
배우 이혜영이 지난 19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헤다 가블러> 기자간담회에서 배역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초연 때 김의경 선생님(배우 이혜영을 발탁한 연출가 겸 극작가)이 <헤다 가블러>를 하자고 해서 ‘그게 뭐예요’ 했어요. 이렇게 세련되고 충격적인 작품을 왜 여태까지 안했을까 여쭤봤더니 ‘이혜영 같은 배우가 없었기 때문이지’라고 하셨죠. 헤다는 내가 있으니까 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했고, (이번에도) 그 착각을 방해하는 요소는 아무것도 만나지 않고 있어요.”
배우 이혜영이 13년 만에 다시 연기하게 된 ‘헤다’에 대해 특유의 꼿꼿한 말투로 내놓은 소회다. 19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헤다 가블러> 기자간담회에서 이혜영은 “초연 때 부족한 게 있었다면 (그 부분을) 완성하기 위해 헤쳐 모였다”며 “새롭게 애 많이 썼고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다 가블러>는 ‘근대 연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이 1890년 발간한 희곡이다. 이 작품이 국내에선 초연 이후 120년이 지난 201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처음 소개됐는데, 당시 전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하고 이혜영은 주요 연기상을 휩쓸었다. 올해 국립극단이 관객 러브콜에 따라 다시 올리는 ‘Pick 시리즈’ 개시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과 비슷한 시기에 LG아트센터에서도 배우 이영애 주연으로 같은 작품이 공연돼 관심을 모았다.
극의 얼개는 몰락한 장군 집안의 헤다 가블러라는 상류층 여성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예르겐 테스만이라는 학자와 결혼하면서 벌어지는 얘기다. 권태로운 삶에 놓인 헤다에게 과거의 연인이었던 뢰브보르그가 다시 나타나고, 헤다를 욕망하며 구속하려는 브라크가 얽혀들며 파국을 맞게 된다.

헤다(배우 이혜영)와 브라크 검사(배우 홍선우)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 국립극단 제공
헤다는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인물로 이야기되지만, 그것 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존재다. 도도하면서 위악적이고, 삶에 대한 권태를 드러내면서 ‘아름다움’과 같은 높은 차원을 갈망한다. 금발에 흰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선 이혜영은 귀에 꽂히는 발성과 우아한 몸짓, 오만한 듯 공허한 시선으로 백열등처럼 작열하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종국에는 주변과 자신을 파괴하는 헤다의 선택을 납득할 순 없어도 ‘그럴법 하다’고 설득력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날 간담회에서 이혜영은 헤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질문에 “그렇게 보는 게 정상”이라고 말해 좌중에 웃음이 번졌다. 그는 “당시(19세기 유럽) 헤다는 ‘괴물’로 불렸는데 21세기에도 ‘그녀가 왜 그럴까’라고 느껴진다는 점에서 놀라운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영애의 헤다가 현대인의 신경증적인 내면을 그리려 했다면, 이혜영의 헤다는 입센의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며 초연 때의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에서 실존적 인간으로 캐릭터 해석에도 변화를 줬다. 1970년대로 배경을 옮기면서 상류층 가정의 현대적인 거실로 꾸며진 무대에는 사이키델릭한 음악과 조명이 흐른다.

<헤다 가블러> 공연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헤다 가블러의 남편 예르겐 테스만(김명기 배우), 헤다(이혜영 배우), 헤다의 옛 친구 엘브스테 부인(송인성 배우)(왼쪽부터).
초연에 이어 다시 연출을 맡은 박정희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헤다를 설명하는 주요한 모티프로 삼았다. 니체는 혼돈과 무질서로부터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는 디오니소스(그리스 신화에서 술과 축제의 신)적 충동을 긍정했다. 극에서 헤다는 “머리에 포도 넝쿨”이라는 대사를 반복해 가치 없는 삶에서 벗어나려 하는 결말을 암시한다. 박 감독은 “아름다운 세계,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선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헤다의 경우 삶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지금의 삶을 파괴해야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공연은 지난 8일 개막 예정이었으나, 하루 전날 브라크 검사 역을 맡은 윤상화 배우의 갑작스런 건강 문제로 배우가 교체되고 개막이 미뤄졌다. 긴급 투입된 홍선우 배우는 이틀 만에 대사를 모두 외우며 처음부터 캐스팅 된 것처럼 무리 없이 배역을 소화했다. 이혜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처럼 모두가 지난 일주일간 고통과 죄의식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고 지금 이렇게 공연을 하는 게 기적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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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시작부터 관객을 깜짝 놀라게하는 총성처럼 이혜영은 여전히 강렬하다. 그는 “초연 때와 다른 것은 단 하나, 지나온 세월”이라고 했다. “나이가 든 데 대한 부담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도 “같이 하는 배우들이 나를 헤다로 믿을 수 있게 연습 때부터 공연이라 생각하고 노력했다”고 했다.
LG아트센터 제작의 <헤다 가블러>와 비교하는 시선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배우가 다르고 프로덕션 전체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는 불가한 것 같아요. 헤다에 담기는 제 모습은 있는 그대로입니다.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공연을 만들어 나갈 때 결코 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 얘기는) 여기까지.”

<헤다 가블러>는 헤다라는 상류층 여성이 부르주아 사회 속에서 존재의 자유를 갈망하다 파괴적 결말을 맺는 얘기다. 국립극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