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국제해양연구소’ 위장 간판 달고 출발
남영역 바로 옆이었지만 고문 현실 아무도 몰라
감각 무력화하는 계단 등 철저한 ‘고문 특화 설계’
완공 50년 만에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재탄생

옛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에 마련된 민주화운동기념관의 전경. 오른쪽 검은색 벽돌 건물이 조사실이 있던 구관이다. 조사실이 있는 5층의 창문은 머리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지하철역에 열차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르내린다. 역사 건너편 한 건물의 테라스에서는 점심을 먹은 직장인들이 한 손에 커피잔을 들고, 아래쪽 테니스장에서 시합하는 동료들을 내려다본다. 어떤 이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안부를 묻고, 동료와 담뱃불을 나눠 붙인다. 그러다 “더 효과적으로 패려면 보약이라도 지어 먹어야겠어.”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다.
같은 시각, 옆 7층짜리 검은색 벽돌 건물의 5층. 사방이 온통 빨갛게 칠해진 방에 한 사람이 있다. 칠성판에 몸이 묶인 채 얼굴에 수건이 덮이고, 고춧가루가 든 물이 코와 입으로 콸콸 쏟아진다. 축 늘어진 그의 옆에서 손가락으로 배를 찔러보던 ‘고문기술자’가 “거, 장 파열은 아니구먼. 더 부어도 돼”라고 말한다. 불은 늘 환하게 켜져 있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1976년 ‘국제해양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을 달고 한국의 ‘아우슈비츠’로 작동한 옛 내무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의 어느 하루를 생존자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장면이다. 일상과 죽음이 교차하고, 살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이 엇갈리던 곳이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과 불과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지옥이 있었다. 바로 옆에 대기업 본사도, 초등학교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높은 담장과 검은 철문 너머 저 건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불법 구금과 고문을 자행하고, 간첩 사건을 조작해 독재 정권의 보위 기구로 맹활약한 대공분실. 중앙정보부와 경찰, 보안사령부가 운영하던 수십 개의 대공분실 중 원형이 남아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건물이 완공된 지 50년 만인 오는 6월10일 6·10항쟁 기념일에 맞춰 민주주의 역사를 증언하는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재탄생한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게 만든 ‘고문 특화 건물’
개관을 앞두고 지난 20일 기념관을 찾았다. 전시 안내를 맡은 조규연 행정안전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략기획실장이 먼저 이끈 곳은 ‘치유의 길’이다. 기념관을 조성하며 새로 지은 신관에서 구관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이다. 옆으로 남영역 플랫폼이 보이고, 5층 조사실의 좁은 창을 빗댄 띠창 사이로 장미꽃 화분이 놓여 있다. 그 너머로 테니스 코트를 조망할 수 있다.
조 실장은 이곳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함’을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악은 비판 없이 주어진 역할이나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평범한 사람이 만들어낸다는 개념이다. “독일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기사는 음악을 들으면서, 가족과 통화를 하면서 가스실 단추를 누르죠. 행위 자체를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곳 경찰들도 테니스장에 내려와 체력을 단련하고, 취미활동을 하다 5층 조사실에서 고문했죠.”
남영동 대공분실은 당시 내무부장관 김치열이 발주했고, 건물의 설계는 김중업과 더불어 한국 건축의 양대 산맥을 이룬 건축가 김수근이 맡았다. 제자들은 “스승이 알고 그랬을 리 없다”고 하나, 직접 대공분실을 본 사람들은 건축가가 고문 시설로 쓰일 것을 몰랐을 리 없다고 말한다.
대공분실은 그 자체로 고문을 위한 거대한 장치였다. 설계는 꼼꼼했다. 연행된 사람은 1층에서 5층 조사실로 곧바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눈이 가린 채 뱅글뱅글 오르내리는데, 위치 감각이 무력해진다.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공포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수많은 고문 피해자는 증언했다.
5층 조사실의 책상과 의자는 설계도대로 자리 잡았고, 모두 바닥에 고정됐다. 천장 등은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철망으로 보호된 형태로 설계됐다. 투신을 막기 위해 창문 폭은 좁게 만들었다.
이날 동행한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창문을 바라보면서 “고문을 당하다 죽나, 떨어져 죽나 매한가지라 나도 몇 번 뛰어내리려고 머리를 들이받았는데 빠져나갈 수 없었다. 건물 자체를 고문실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이곳에서 40일간 고문을 당했다.
조사실 벽에는 나무로 된 흡음판을 댔다. 저음은 흡수해 조사 과정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옆방에서 알 수 없지만 고음은 전달해 고문으로 인한 비명이 옆방에 전달된다. 공포감을 주기 위한 장치이다. 조사실 문에는 외시경이 달려있어 밖에서 안을 감시할 수 있다. 외시경 테두리엔 꽃무늬 같은 장식이 있는데, 쓸데없는 섬세함에 소름이 끼친다.
5층에는 모두 15개의 조사실이 있다. 계단으로 통하는 문은 3개인데, 피의자가 도주하는 걸 막기 위해 조사실 출입문과 똑같이 만들어 위장했다. 조사실 출입문은 서로 엇갈리게 배치해 건너편 조사실을 볼 수 없도록 했다.
조사실에는 감시장비가 촘촘히 설치됐다. 2022년 대공분실 구조보강 공사를 위해 천장을 일부 걷어내고 작업하던 중 510호를 비롯한 5개 조사실에서 마이크가 발견됐다. 1970년대 일본 소니의 전문 음악공연용 고성능 마이크였다. 조사실 천장 한쪽 검은 유리 안에는 감시 카메라를 달아놓았다.
고 김근태 선생이 고문을 당한 515호에는 영화 <남영동1985> 제작진이 기증한 칠성판이 있다. 이 위에서도 전기고문, 물고문이 자행됐다. 영화는 김근태 선생이 1985년 9월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된 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인 이근안과 백남은 등에게 고문당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김근태 선생이 고문을 당한 조사실 515호에 있는 칠성판과 박종철 열사가 숨진 509호 안을 볼 수 있는 외시경의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가해자는 아직 반성·사죄 없어
조사실 509호는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던 중 욕조에 목이 눌려 숨진 곳이다. 경찰은 리모델링을 한다며 다른 조사실을 모두 훼손했으나 이곳만은 박종철 열사 아버지 고 박정기씨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반대로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
고위급 피의자들을 조사한 3층 특수조사실 바닥에는 멍석이 깔려있었다. 곡괭이 자루와 전기고문을 위한 장치도 전시되어 있다. 멍석말이 후 물을 뿌리고 매를 치면 겉으론 멍이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골병이 든다고 한다. 5층 조사실은 온통 빨갛고, 노란색으로 칠해져 오래 갇혀 있으면 심리적으로 굉장히 위축된다고 하는데 이곳 화장실도 붉은 주황빛이 감도는 타일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 이사장은 “벽면과 바닥 색깔이 완전히 빨갛거나 노래서 고문실에 가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내가 어디 있는지, 지금 몇 시인지도 모르게 구조를 만들었는데, (경찰이) 그걸 아주 훼손했다. 조사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자료를 계속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왜 복원해야 하냐. 민주주의를 압살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고문당한 사람은 다 죽고 싶어 했다. 그 원형을 복원함으로써 우리 민주주의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쳤냐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3층 특수조사실과 벽을 공유하면서 마당의 테니스장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반장실’이 있다. 가장 해가 잘 드는 이곳에는 설계도에 따르면 소파 4개와 침대가 배치되어 있다. 바로 벽 뒤에서 고문이 자행되는데, 이곳에서 어떤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을까. “자신들의 일상은 지키면서 다른 사람의 일상을 빼앗은, 같은 시대를 전혀 다르게 살아간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관에 있는 ‘기억의 통로’(왼쪽)와 ‘기억의 벽’. 주영재 기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고문실태조사 결과 이곳에서 최소 400명 넘는 이들이 고문 피해를 당하였다. 신관에서 구관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설치작품 ‘기억의 통로’는 이들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피해자들을 상징한다.
400개의 철사로 통로를 만들었는데, 손으로 스치면 ‘충충충’ 탄성감있는 쇳소리가 난다. 소리로 이들을 기억하길 바란다는 의미가 담겼다. 바로 옆 ‘기억의 벽’에는 국가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사망했다고 인정한 136명의 이름이 붙어있다.
마당 한쪽에는 사과나무, 감나무, 배나무 등을 심은 ‘민주 과수원’이 있다. “인권을 파괴하고 짓밟았던 공간을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인권이 부활하는 공간으로 만들려는 의미를 두고 있다”고 이재오 이사장은 설명했다.
일선에서 고문을 자행한 수사관도, 대공분실을 만든 당시 치안 최고 책임자도, 건축 설계를 담당한 이도, 고문을 참다못해 나온 허위 자백을 유죄의 증거로 삼은 검찰과 사법부 모두 독재정권을 굴러가게 한 톱니바퀴의 일부였다. 이들 중 자신의 가해를 인정하고, 사과나 반성을 표한 이는 찾기 어렵다. 화해와 용서의 열매를 맺으려면 이들이 먼저 진실을 밝히는 데 일조해야 한다.
내달 개관하는 민주화운동기념관은 신관(M1)과 대공분실을 복원한 구관(M2), 두 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됐다. 신관은 ‘역사를 마주하는 낮은 시선’이라는 건축적 의미를 담아 지하로 내려가는 동선을 통해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조명한다.
4·19혁명, 5·18광주민중항쟁, 6·10항쟁 등 주요 민주화 운동과 학생·노동·언론·종교계·여성 등 다양한 주체의 운동을 대형 미디어와 체험형 콘텐츠로 소개한다. 구관은 나선형 계단과 조사실 등 공간이 좁아서 사전 예약제로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