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한국옵티칼 고공농성 500일
21일 찾은 경북 구미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는 불에 탄 흔적이 가득했다. 타다 만 철골 구조물들이 천장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고 바닥은 온통 새카만 잿더미였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는 빈터가 훤히 보였다. 말 그대로 ‘버려진 공장’이었다.
그 폐허에 인형 200여개가 놓였다. 전국에서 시민들이 보내온 ‘인형 동지’들이다. 박정혜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이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옥상에 오른지 500일이 된 이날, 인형 동지들이 시민들과 함께 정혜씨 곁을 지켰다.

21일 경북 구미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 ‘고용승계 고공농성 500일’을 맞아 인형들이 놓여 있다. 우혜림 기자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구미 공장은 2022년 12월 불에 탔다. 일본 니토덴코그룹이 100% 지분을 가진 한국옵티칼은 LCD 편광필름을 생산해 LG디스플레이에 납품하는 제조업체였다. 니토덴코그룹은 화재보험금 1300억원가량을 받은 뒤 구미 공장의 청산을 결정하고 생산 물량을 경기 평택에 있는 ‘쌍둥이 자회사’ 니토옵티칼로 옮겼다. 생산 물량은 이전하면서 고용승계는 하지 않았다. 한국옵티칼 노동자 193명이 ‘희망퇴직’했고 17명이 정리해고됐다. 지난해 1월 8일 정혜씨는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옥상에 올랐다.
정혜씨의 고공농성이 500일을 맞은 이날, 니토옵티칼이 있는 경기 평택에서 민주노총 주최 결의대회가 열렸다. 금속노조 한국옵티칼지회 조합원들도 평택으로 향했다. 한국옵티칼 농성장에 연대해 온 신유아씨는 구미 공장에 혼자 남을 정혜씨가 마음에 걸렸다. 고민하던 그의 눈에 ‘말벌동지’들이 들고 다니는 인형들이 보였다. 각종 투쟁 현장에 뛰어가 연대하는 시민을 뜻하는 말벌동지들은 여러 농성장을 붉은 띠를 두른 ‘인형 동지’로 장식하곤 했다. 유아씨는 “멀리서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신 인형을 보내면 구미 공장이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21일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서 신유아씨가 시민들이 보낸 인형 택배를 열어보고 있다. 우혜림 기자
유아씨는 지난 3일 SNS에 ‘인형 동지들을 보내달라’는 게시글을 올렸다. 이를 본 시민들이 수원, 부산, 고성 등 전국 각지에서 화답했다. 바다 건너 일본 시민들이 직접 인형을 만들어 보내오기도 했다. 이날까지 인형들을 담은 택배 20여개가 구미 공장으로 왔다. 유아씨는 옥상 위 정혜씨가 볼 수 있도록 인형들을 공장 입구 옆에 전시했다. 붉은 띠를 두른 인형들의 손에는 정혜씨를 응원하는 팻말들을 쥐어줬다.
한국옵티칼 노동자들은 인형 동지와 말벌 동지들을 반겼다. 이지영 노조사무장은 “인형이 연대하는 시민들의 분신처럼 느껴진다”며 “말벌동지 분들이 찾아오면 마음이 든든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정나영 조합원은 “말벌동지들이 와서 요리도 해주고 여러모로 챙겨준다”며 “많지 않아도 사람들이 오면 농성장의 온기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21일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서 말벌동지들이 점심으로 카레를 만들고 있다. 우혜림 기자
유아씨와 함께 다른 말벌동지들도 공장을 지켰다. 지난 1월부터 한국옵티칼 농성장에 연대하고 있다는 김선빈씨는 공장 건물들을 소개했다. “자주 오다 보니 옵티칼에 관해선 빠삭하게 알게 되었다”고 했다. 선빈씨가 공장을 둘러보는 사이 울산에서 온 밤비(활동명)씨와 수원에서 온 이민석씨가 점심 식사로 카레를 만들었다. 오후 12시, 세 사람은 알맞게 식힌 카레와 물을 정혜씨가 있는 옥상으로 조심조심 올렸다. 음식을 받은 정혜씨가 세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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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공장을 지키는 말벌동지들은 ‘날씨와 마음’을 걱정했다. 선빈씨는 “날이 점점 더워지고 투쟁도 길어지고 있으니 정혜 동지의 건강과 마음이 말이 아닐 것”이라며 “조금이라도 외롭지 않았으면 해서 자꾸 찾아오게 된다”고 말했다. 민석씨는 “예전에도 노동자들이 투쟁하면 응원하고 있었지만 직접 행동하지 않고는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걸 여기 와서 깨달았다”며 “농성장에 오는 게 즐겁기도 하지만 어서 농성장이 사라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21일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서 박정혜씨가 말벌동지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우혜림 기자
선빈·밤비·민석씨가 준비한 인형도 이날 공장 한 쪽에 놓였다. 적갈색으로 바랜 외벽 옆으로 각양각색의 인형들이 형형했다. 공장 바닥에는 비를 맞고 자란 들꽃들이 하늘 위로 줄기를 길게 뻗었다. 땅에 서있어야 할 노동자 정혜씨는 여전히 하늘 위에 있었다.

21일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 말벌동지들이 놓아둔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앞줄 왼쪽부터 선빈, 민석, 밤비씨가 고른 인형이다. 우혜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