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원 청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에 체포돼 수감생활을 한 60대 남성이 42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선고에 앞서 피고인에게 사과했다.
서울고법 형사4-2부(재판장 권혁중)는 21일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김동현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983년 7월 대법원이 김씨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한 지 42년 만이다.
재판부는 이날 주문을 선고하기에 앞서 김씨에게 사과했다. 재판장인 권 부장판사는 “지금부터는 판결문에 기재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저로서는 40여년이 지난 피고인에 관한 수사기록, 공판기록, 누렇게 변한 기록들을 보고 여러 생각에 잠겼다”며 “피고인이 미농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적어 나간 항소이유서와 상고이유서를 보며 그 안에 담긴 피고인의 절규와 호소, 좌절과 희망, 이 모든 것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권 부장판사는 “피고인은 아마 안기부에 끌려가 오랫동안 구속되고 고문당하면서도 허위 자백이 인권 수호의 최후 보루인 법원에서 충분히 인정받을 거란 희망을 가졌을 것”이라며 “그런데도 1심 법원은 물론 2심, 나아가 대법원까지 어느 심급에서도 단 한 번도 피고인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선배 법관들이 피고인의 호소를 단 한 번도 귀 기울여주지 못한 점, 피고인이 자백을 고문, 불법구금에 의해 할 수밖에 없었음을 과감히 인정하지 못했던 용기 없음, 1980년대에 내려진 불법적 계엄이 헌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과감히 선언하지 못했던 소신 없음, 선배 법관들의 그런 잘못에 대해 대신 사과의 말씀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권 부장판사는 “앞으로 피고인과 같은 옥살이처럼 청춘을 억울하게 보내는 일들이 다시는 없도록, 저희 법관도 다시 돌아보면서 업무에 충실하겠다”며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다”고 말했다.
재판부의 주문을 들은 김씨는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김씨는 1980년 5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자작 시집을 발표했는데, 이 일로 검거될 것이 두려워 1982년 4월 스웨덴으로 출국해 국제앰네스티 스웨덴 지부에 망명을 신청했다. 그는 망명 과정에서 북한대사관을 한 차례 방문했고, 주스웨덴 한국대사관 직원의 설득으로 망명을 취소하고 한달 만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김씨는 김포공항에서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약 40일간 영장 없이 불법 구금돼 조사받았다. 이 과정에서 구타와 고문 등 가혹행위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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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같은 해 11월 1심에서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 2심은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고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그의 서러움은 40년이 지나서야 풀리게 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는 2023년 9월 김씨 사건을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하고 재심 등 적절한 조처를 하라고 권고했다.
김씨는 지난해 1월 재심을 청구했고, 재판부가 같은해 12월 재심을 결정한 뒤 이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안기부 수사관에게 조사받으며 가혹행위를 당했고,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심리적 위축된 상태에서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는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