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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이름을 부를 때

입력 2025.05.21 20:56

밤새 비가 요란하게 내렸다. 마당에 심은 상추, 오이, 가지가 걱정돼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짙은 풀 냄새가 달려들었다. 지난밤에 쏟아진 게 비가 아니라 초록이었을까. 텃밭의 풀도 나무도 색이 깊어졌다. 초록은 밝기가 아니라 깊이로 말해야 하는 색이다. 광합성의 농도가 아니라 잎의 생애가 반영된 색.

빗물에 떠내려온 것들을 치우러 대문 밖으로 나갔다가 이웃집 할머니 밭으로 들어가는 동네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얼마 전까지 할머니 손에 들려 있던 호미를 들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아흔 노인이 평생 손에 쥐고 있던 호미를 내려놓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아는 듯하다. 할머니 텃밭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기 밭처럼 돌본다. 한마을에서 같은 계절과 풍경을 오래 나눈 사이란 그런 것일까. 자주 이사를 했던 내게 ‘이웃’이라는 말은 여전히 속뜻을 알 수 없는 단어다.

대문 앞을 쓸다가 무심코 아주머니의 호미질을 넋 놓고 바라봤다. 보통 솜씨가 아니다. 밭에서는 별별 것이 기운차게 자라는 중이다. 상추도 크고 푸르다. 내 것은 아기 손바닥만 하고 구멍도 숭숭 뚫렸는데. 전문가를 마주한 김에 상추 잎을 뜯어와 조언을 구했다. 아주머니는 우리 집 상추를 쓱 훑어보더니 진단을 내렸다. 범인은 민달팽이, 처방된 약은 커피 찌꺼기다.

본격적으로 텃밭 가꾸기 기술을 배워보려고 아주머니 옆에 앉아 잡초를 치웠다. 제일 먼저 배운 것은 바랭이, 쇠비름, 깨풀. 잡초에도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을 끝자락 파란 지붕 집에는 김 아무개가, 감나무 집에는 박 아무개가 살고 조팝나무 아래 하얀 스티로폼 상자 안에는 검은 고양이가 산다는 것도. 내가 검은 고양이를 몇번 본 적 있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무엇이 다를까?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보는 것, 풀의 이름 하나 모른 채로 그냥 보는 것이고,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고 만지고 돌보면 아는 것이라고 했다. 아주머니의 말이다. 나는 경쾌한 호미질을 바라보며 알고 싶은 것을 하나씩 떠올렸다. 말을 걸고, 부르고, 만지고, 돌보고 싶은 것들. 결국 안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일까. 어쩌면 이따금 나를 괴롭히는 외로움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다 알지 못해서.

풀을 다 뽑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주머니가 내게 이름을 물었다. 이제 나는 민달팽이의 공격을 받은 신촌 마을의 아무개가 될지도 모르겠다. 마을의 이야기에 내가 포함된다는 사실이 싫지 않다. 지리학자, 이 푸 투안이 말했던가. 하나의 공간을 경험하고 기억하고, 감각하면 장소가 된다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 공간을 지나 장소에 이르는 중이다.

커피 찌꺼기를 텃밭에 뿌리며 이 장소를 음미한다. 온통 초록이다. 하지만 5월의 신록과 무섭게 짙은 7월의 초록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풀 한 포기마다 초록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도. 본 것이 아니라 알게 된 것이다. 초록을 알게 될수록 나를 알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초록의 이름을 부르고 만질 때, 먼 곳을 떠돌던 내 이름이 집을 찾아가는 것 같다. 농사에는 영 재능이 없지만, 마을에서 그럭저럭 잘 살아가는 아무개, 그게 나인 것 같다.

신유진 작가

신유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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