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어떤 길에도 손이 있다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닫기

보기 설정

닫기

글자 크기

컬러 모드

컬러 모드

닫기

본문 요약

닫기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닫기

어떤 길에도 손이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지원하는 해외 한국학대학 번역 실습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다. 내일은 지난 3월부터 내 시집을 가지고 번역 실습을 한 러시아 교수와 학생들에게 강연해야 한다. 모스크바에서 한국학을 가르치시는 M 교수님 덕분에 대학교와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말하는 일을 제법 오래 해왔지만, 아직도 그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때그때 청중이 달라지고, 그들이 강연에서 원하는 바도 각기 다를 것이다. 고마운 것은 이 익숙지 않음이 내게 자극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낯선 길에 내딛는 첫 발짝이 주는 설렘과 두려움처럼.

지난 4월, M 교수님을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합동 강연이 끝나고 M 교수님과 함께 이동하는 길이었다. 지도를 보고도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는 걸 눈치채신 M 교수님은 내가 길눈이 어둡다는 걸 단박에 간파했다. “서울 참 복잡하죠?”라는 그의 물음에 “지도를 그리는 중이에요” 같은 시답잖은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 말이 갖는 중의성을 파악했던 것일까. M 교수님이 크게 웃었다.

“실은 저도 길이 자주 헷갈리거든요. 아까 조금 늦은 것도 길을 헤매다 그랬어요.” M 교수님이 대학교에서 도보로 5분 걸리는 호텔을 예약한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혹시 길을 잃더라도 오래 헤매지 않고 돌아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리라. 또한 GPS 오류가 자주 발생하는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3년이 넘게 흘렀고, 침공이 전쟁이 되고 알다시피 양국의 갈등이 점점 심화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와주셔서 고마워요.” M 교수님이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실은 이 자리에 오는 데 마음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도 이것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어떤 것도 명분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 명백해졌다. “문학은 약자의 시선으로 시작되고 약자의 언어로 완성되잖아요. 그 약함으로 길을 내지요. 없는 길은 새로 만들고 이따금 구멍 난 길은 메우기도 하면서요.” 천천히 말하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말이 향하는 곳을 알아챈 것일까. M 교수님이 환히 웃었다.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탈 때 시간이 촉박했다. 여유가 없으면 가뜩이나 어두운 길눈이 더 깜깜해진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도리질을 하는데 한 남자분이 말씀하셨다. “마스끄바? 위드 미, 위드 미.” 아무래도 상하이까지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신 분 같았다. 다급한 상황인지라 무작정 따라갔다. 어린 시절 사탕을 주는 아저씨를 따라가면 안 된다고 배웠지만, 배고픈데 사탕밖에 먹을 게 없을 때는 별수 없이 그거라도 먹어야 한다. 그의 선의 덕분에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어떤 길에도 손이 있다. 어쩌면 먼 길 가는 나그네인 ‘길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손길’일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 M 교수님과 식사하는데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피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맞은편의 누군가가 총명한 할머니가 되고 그 할머니가 다시 ‘안나’라는 이름의 사람이 되는 상상을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사이좋게 웃고 있었다. 힘을 합쳐 길을 트고 닦듯, 그 길에 기꺼이 함께 깃들듯. 모든 길이 그렇듯 사람이라는 길 또한 쉽게 열리지 않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르는 것처럼,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인 것처럼.

머릿속에 길이 나기 시작하는데 M 교수님이 말한다. “시집을 읽고 한국어를 끝끝내 사랑하는 시인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저도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사랑해요.”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 나는 내 길을 발견한 것 같았다. 믿음이 있으면 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고 어디서든 다시 나타나 손을 뻗는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구독 취소하기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보기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닫기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