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열린 회담 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게 ‘백인 농부 집단 학살’ 관련 기사를 들어 보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백인 농부 집단학살’ 의혹을 주장했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미리 준비한 영상을 틀고 관련 기사가 실린 종이뭉치를 내밀며 대부분 사실이 아닌 주장들을 펼쳤다. 남아공 대통령을 대상으로 백인 농부 집단학살을 주장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된 ‘리얼리티 쇼’에 가깝다는 평이 나온다.
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12일엔 남아공의 백인 49명이 미국에 난민 자격으로 입국했다. 사실상 모든 난민의 입국을 거부해온 트럼프 행정부가 남아공 백인들만은 신속하게 입국시키고 미국 내 정착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남아공이 백인의 토지를 몰수하고 있으며, 남아공 백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지난 3월18일에는 에브라힘 라술 전 주미 남아공 대사를 ‘외교적 기피인물’(페르소나 논 그라타) 지정해 추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남아공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철석같이 믿고 퍼뜨리는 남아공 백인 농부 집단살해의 진실은 무엇일까.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을 토대로 남아공 백인의 상황에 대해 사실관계를 정리했다.
트럼프가 인정한 ‘유일한 난민’ 아프리카너는 누구?
아프리카너는 17세기 남아공에 정착하기 시작한 네덜란드 및 북유럽 정착민의 후손을 일컫는다. 이들은 아프리칸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아프리카너는 남아공 백인 인구의 절반을 조금 넘는 비중을 차지하며, 나머지 백인들은 영국 정착민의 후손이다. 지난 2월 트럼프 대통령은 남아공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중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에서 벗어나려는” 아프리카너를 대상으로 난민 지위를 명시했다.
남아공은 1910년 영국의 자치령이 된 후,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극단적 인종차별정책)로 인종 분리 정책을 펼쳤다.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남아공 흑인들은 강제로 고향에서 쫓겨났고, 백인들과 분리됐다.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돼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했지만, 지금까지도 남아공엔 인종 간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 남아공 정부의 토지 감사에 따르면, 남아공 백인은 전체 인구의 10%에도 못 미치지만, 개인 소유 농장과 농지의 4분의 3을 소유하고 있다. 남아공 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남아공 백인은 국가의 거의 모든 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입국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들이 1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덜레스 국제 공항에 도착해 미국 국기를 흔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남아공 정부는 백인 땅을 몰수했나?···“현재까지 몰수 0건”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됐을 때, 남아공 흑인들이 보유한 토지는 전체의 13%에 불과했다. 만델라 정부는 토지 재분배를 위해 토지를 수용할 경우 소유주에게 보상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러한 토지 재분배 정책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2018년 라마포사 대통령이 취임한 후, 그는 경제나 식량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에서 보상 없이 토지를 수용하는 정책을 지지했다. 해당 법안의 정당성에 대한 사회적 토론 끝에 지난 1월 법이 제정됐다.
해당 법률은 보상 없이 토지를 수용할 경우, 특정 조건에만 허용되도록 제한했다. 토지가 경작되거나 사용되지 않고 방치된 경우 등이다. 토지 수용 전에는 반드시 법원의 검토를 거쳐야 한다.
남아공 정부는 이 법에 따라 실제로 수용한 토지는 아직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같은 토지수용 정책은 남아공의 백인 중 특히 아프리카너 농부들의 반감을 샀고, 온라인을 중심으로 우파들의 관심을 끌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백인 집단학살 영상’을 재생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보어인을 죽여라”는 구호는 왜 나왔나?···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 역사 맥락 이해해야
트럼프 대통령이 튼 영상에 나오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구호 “보어인을 죽여라(Kill the Boer)”는 남아공 극좌 정당 지도자 줄리어스 말레마가 정치 집회에서 외친 노래다. 보어인은 네덜란드어와 아프리칸스어로 농부를 의미한다.
자극적인 증오 발언으로 보이지만, 이 구호는 오랜 시간 극단적 인종차별에 시달려온 흑인들이 저항하며 사용한 상징적 구호라는 맥락에서 봐야 한다. 실제로 아프리카너의 이익단체 아프리포럼이 이 구호 사용을 금지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백인 정권에 저항하는 흑인들의 구호에서 비롯한 상투적 표현이라는 이유로 기각했다.
하지만 2023년 말레마가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이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남아공 출신 억만장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귀에 들어갔다. 머스크는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이기도 하다. 머스크는 남아공에서 백인에 대한 집단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극우의 음모론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리카너를 난민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남아공 백인 농부는 정말 ‘집단 살해’당했나?···법원 “상상일 뿐”
남아공 법원은 이에 대해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남아공 법원은 지난 2월 백인 집단 학살 주장에 대해 “명백히 상상된 것이며 실제가 아니다”라고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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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에 따르면 남아공에서 지난해 10~12월 사이에 6953명이 살해됐는데, 이 중 12명이 농장에 대한 공격으로 사망했고, 그중 한 명만이 농부였다. 이 중 4명은 농장 직원, 5명은 농장 거주자였다. 이들은 대부분 흑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BBC는 전했다. 살해당한 여성은 961명, 어린이는 273명에 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준 영상은 도로변에 줄지어 선 십자가를 무인기(드론)가 촬영한 장면으로 끝난다. 이 영상은 머스크가 지난 3월 자신의 엑스 계정에 공유한 것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는 흰 십자가들이 어디에서 촬영됐는지, 영상이 진짜인지조차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