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세혁 작가. 오 작가의 희곡집 <초선의원>의 표제작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선의원 시절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걷는사람 제공
초선의원 시절 노무현을 모티브로 한 표제작 담은 희곡집
심판받아야 할 자들이 심판자 위치에 서려 하고
정치적 다양성 멸종된 1980년대 후반
오늘이라고 그때와 다른가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 심판자의 위치에 서 버린다면 우리 모두 죽어 간 이들에게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야당은 내일의 여당, 내일의 여당은 모레의 야당입니다. (여당 의원을 가리키며) 이분은 작년에 우리 당에서 저쪽 당으로 가신 분이고, (야당 의원을 가리키며) 이분은 저쪽 당에서 우리 당으로 오신 분이고. 우리도 언젠가 여당이 될 텐데, 두루두루 친해 놓으면 좀 좋아요.”
![[책과 삶] 노무현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소환하다](https://img.khan.co.kr/news/2025/05/22/l_2025052301000620500064062.jpg)
초선의원
오세혁 지음
걷는사람 | 312쪽 | 1만8000원
희곡집 <초선의원>의 표제작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선의원 시절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그가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배지를 단 것이 1988년 5월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당시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에 나오는 대사들은 마치 2025년 5월의 정치 현실을 말하는 것 같다. 정치적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 다시 정권을 잡으려 하고, 멸종된 정치적 다양성은 유권자에게 제3의 길을 유도하지 못한 채 매번 도돌이표 같은 선택만 하게 만든다.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 희곡은 앞으로도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다.
“텅 빈 무대 위에서 1988년 굴렁쇠 소년이 굴렁쇠를 끌며 무대를 질주한다”는 지문과 함께 희곡은 시작한다. 기자가 등장해 올림픽을 계기로 ‘선진국’의 반열에 든 대한민국의 모습을 찬양한다. 기자가 시민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거리의 변호사 ‘수호’가 등장한다. 열악한 노동자의 현실을 말하며 올림픽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말끝마다 ‘~지요’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레 노 전 대통령이 떠오른다.
무대는 1987년 거제도로 옮겨간다. 그해 노동조합 시위에 참여하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현 한화오션) 노동자 이석규에 대한 얘기를 다룬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모두 실명을 썼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가 담겼다.
올림픽을 배경으로 스포츠와 정치를 결합한 작품이다 보니 무대에는 달리기, 레슬링 등 스포츠 종목을 서사와 연동해 풀어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석규의 시신을 탈취하려는 용역 깡패들과 노동자 구사대의 대결을 “구사대 패거리는 시신을 빼앗으려 하고, 명제 패거리는 사수하려 한다. 이것이 마치 복싱 경기처럼 펼치진다”라고 설명한 지문 등이 그렇다.
2022년 초연한 연극은 몸의 움직임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공연인 신체연극이라 부를 만큼 배우들의 움직임이 많았다. 당시 관람평에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나까지 숨이 찬다’는 얘기도 있었다. 비록 무대보다는 덜하지만 희곡집도 읽다보면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흥미롭다.
수호는 야당 정치인 ‘격수’를 만나 정계에 입문한다. 이후 온도계 제조업체에서 일하다 1988년 열일곱 살 나이에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노동자 문송면을 만난다. 수호를 만난 송면은 “설마… 국회의원이… 직접 여길 올 리가 없을 텐데”라고 한다. 이어지는 지문은 “마치 우주인들이 외계 행성의 외계인을 만난 것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이다. 올림픽의 열기, 지리멸렬한 국회의원들의 모습과 열악한 현실 속 노동자 모습이 교차하며 비극과 희극을 오간다. 대망의 5공 청문회 현장. 전두환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의 궤변에 수호가 울분을 참지 못한다.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진 사건으로 청문회 스타가 된 노 전 대통령의 일화를 거의 그대로 옮겨왔다.
‘보도지침’ ‘괴벨스 극장’ 등 사회적 사건을 무대로 옮겨가는 작업을 이어오며 연극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극작가이자 연출가 오세혁의 작품이다. 그는 22일 전화에서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고 관련 연극이 몇 있었는데 다 마지막 순간의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분의 빛났던 순간을 담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이어 “‘초선의원 2’라고 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선 시절을 다룬 작품을 준비 중이다. 1970년대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의 이야기 등도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희곡집에는 ‘초선의원’을 비롯해 인간과 정치의 관계를 통찰하게 하는 작품 5편이 실렸다. 수록작 중 하나인 ‘킬링 시저’는 셰익스피어의 고전 <줄리어스 시저>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인데, 이 대본으로 배우 김준원과 손호준이 시저, 유승호가 브루터스로 출연하는 연극 <킬링시저>가 지난 10일부터 공연 중이다. 희곡집을 읽고 공연을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