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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에 대해 우려하는 학부모에게

[조희연의 시대사색]‘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에 대해 우려하는 학부모에게

“교사 정치활동 보장한다던데… 아빠, 제발 이런 건 막아주세요. 주위에서 큰일 난다고 이야기하네요.” 며칠 전 큰애에게서 온 문자입니다.

교육계 숙원이던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이 주요 정당의 대선 공약으로 채택되며 실현 가능성이 한층 커졌습니다. 이 사안은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깊이를 더해가는 여정 속에서 꾸준히 논의된, 어쩌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 많은 학부모의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사에게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된다면, 아이들이 배우는 소중한 교육의 장에서 특정 정치적 색채가 주입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당연하고도 마땅한 걱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이야기도 들어주십시오. 학부모인 저의 큰애에게 띄우는 편지이기도 합니다.

먼저 교사에게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과 교사가 교실에서 지켜야 할 교육 내용의 중립성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교육 과정의 정치적 중립성은, 의문의 여지 없이, 교사들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신성한 책무입니다. 시민으로서의 교사는 자유롭게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활동할 수 있어야 하지만, 교육자로서 아이들 앞에 설 때는 철저히 중립적인 입장에서 가르침을 펼쳐야 합니다.

대학교수들이 정당 활동을 한다고 해서 성인인 학생들에게 편향된 견해를 주입한다고 여기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교사와 교수의 차이는 단지 가르치는 대상이 아직 세상에 대해 배우고 있는 중고등학생이냐 아니면 성인이냐 하는 점일 뿐,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교육자로서의 책무는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중고등학생에게 미치는 교사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교실 안에서의 철저한 중립성이 더욱 강조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협약’ 도입

어떻게 중립이 가능할까요? 학부모님의 우려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으로,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참고해볼 수 있습니다. 1976년에 마련된 이 협약은 세 가지 중요한 원칙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학생들에게 특정한 견해를 강제로 주입하거나 교화해서는 안 된다는 ‘강제성의 금지’ 원칙, 둘째 수업에서 현실 세계의 다양한 논쟁적 사안을 다루되 여러 입장을 균형 있게 제시해야 한다는 ‘논쟁성의 유지’ 원칙, 셋째 학생들이 스스로 현실적 상황을 판단하고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행위 능력 강화’ 원칙입니다. 학부모님의 우려는 주로 첫 번째 원칙과 맞닿아 있습니다. 중립성의 의미도 그것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충분히 만들 수 있고, 법에도 같이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한국 교직 사회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활발하며,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협약 초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여러 교육감이 한국형 협약 제정을 위한 논의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군사독재와 싸우던 시절, 일부 교사들이 권위주의 미화를 경계하며 ‘올바른 의견’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교육한 때도 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가 권위주의에 향수를 느끼거나, 특정 역사적 사건을 왜곡하는 퇴행적 인식을 갖지 않도록 가르치려 했던 것이죠.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는 한 단계 진전했습니다. 교실은 더 이상 특정 진영의 선전장이어서는 안 되며, 다양한 관점이 공존하는 토론의 장이어야 합니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해서도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 보장은 필요합니다. ‘실생활 기반 교육’이나 ‘논쟁적 교육’과 같은 현대 교육학의 흐름은 아이들의 사고력을 길러주기 위해 현실의 복잡한 문제들을 교실로 가져와 토론하고 탐구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최근의 정치적 격변기는 오히려 우리가 법·제도·선거·사회운동 등에 대해 살아있는 교육을 하는 귀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격변의 시기는 기존의 지식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배움의 순간입니다.

사회 이미 성숙, 해결할 수 있어

하지만 이러한 현실의 역동적인 소재를 교육에 활용하려 할 때,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이나 학부모님의 항의 때문에 교사가 조심스러워지거나 아예 교육적 노력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교과서 지식은 인공지능이 더 잘 아는 시대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과서 밖의 세상과 마주하며 창의적인 질문을 던지고 창발적인 사고를 하는 능력입니다. 이는 비단 대학생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학생들이 현안에 대해 단순히 특정 정치적·사회적 입장을 암송하는 대신, 다양한 관점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도록 돕는 노력은 이미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이나 경기도교육청의 ‘역지사지형 토론 수업’이 주요한 사례입니다. 첨예한 논쟁 주제에 대해 1단계에선 찬성 입장으로 토론했다면, 2단계에선 반대 입장으로 토론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사의 철저한 정치적 중립하에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돼야 하는 이유는 혐오와 증오, 편견에 물든 언어들에 대해 균형 잡힌 교육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론장에서는 비난받아 마땅한 언어들이 여과 없이 10대들의 언어 세계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약자를 향한 조롱과 차별적 표현이 넘쳐납니다. 때로는 이러한 혐오 표현이 성인 사회의 극단적인 정치적 언어나 가짜뉴스와 결합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재 교육 현장에서는 정치적 논란을 우려해 민감한 주제에 대한 균형 잡힌 지도를 피하고 있습니다. 또래 사이의 장난으로 포장된 정치적 혐오와 편견의 언어가 ‘숨 쉬듯 자유롭게’ 반복될 때, 미래세대에게 필요한 균형 잡힌 교육을 제대로 제공하기 위해서는 교실이 정치적 금기가 아닌, 밝고 건강한 교육 공간이 돼야 합니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이 제약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전통적인 교원단체인 교총과 전교조, 그리고 새롭게 부상한 교사노조연맹까지 교사를 대표하는 모든 단체가 이 문제 해결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할 만큼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신호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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