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후 퇴근길에 생활협동조합(생협)에서 제주 세미놀을 사왔다. 2㎏ 한 상자에 1만9500원. 지난해 1만9550원과 큰 가격 차이가 없다. 세미놀은 온주밀감처럼 가을·겨울이 아닌 봄에 수확하는 귤인 만감류다.
그런데 세미놀은 다른 만감류와 달리 과육 한쪽 한쪽마다 씨앗이 있다. 과일 1개에 5~15개쯤 씨앗이 나온다. 먹기에 조금 불편하다. 또 당도보다는 산도가 높다. 그래도 과즙이 풍부해 최근 시작된 무더위에 쌓인 피로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만감의 특별한 효능이다. 왜 조선시대 신하들이 감귤을 임금에게 가장 받고 싶은 하사품으로 꼽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농촌진흥청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에는 400여종의 감귤이 있는데 그중 40여종을 주로 키운다. 이 가운데 나는 만감을 좋아한다. 1월 말부터 레드향과 한라봉을 시작으로 천혜향, 청견, 진지향, 세미놀 등이 5월 말까지 나온다. 당도는 레드향이, 산도는 천혜향이 강하다. 나도 이 둘을 가장 좋아한다. 그런데 올해는 가격이 저렴한 세미놀에 손이 간다.
그 전주 퇴근길에는 청로를 샀다. 생협에서 청로 가격은 세미놀보다 비싼 2만5300원이었다. 앞선 4월에 천혜향은 이보다 가격이 좀 더 비싼 2만6700원이나 했다. 천혜향과 청로는 지난해에는 2만2000~2만3000원이었는데 올해에는 10% 이상 올랐다. 2년 전에는 2만원을 하지 않았다. 해마다 가격이 오른다. 기후위기 때문이다.
지난해 제주는 8월까지 폭염에 가뭄이 겹쳤다. 그러다 9월에 비가 몰아서 내리면서 귤의 중간이 터지는 열과 피해가 극심했다. 지난해 열과 피해가 전체 과수의 19.8%에 달하며 2023년 피해(8%)의 2배 이상이었다. 지난해에는 기상 관측 이래 113년 만에 가장 더웠는데 최남단인 제주는 한반도가 겪고 있는 이런 기후위기의 최전선이었다.
기후위기 탓에 아예 생협에서 구경하기가 어려운 만감 품종도 있다.
올해는 특히 내가 좋아하는 레드향을 보기 어려웠다. 껍질이 얇아서 지난해 폭염 피해가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금향이나 진지향은 동네 생협에서 몇년째 못 봤다. 이런 상황에서 한결같은 가격의 세미놀이 반갑기까지 하다.
문제는 감귤만이 아니다. 올해 제주 월동무는 유난히 작았다. 내가 요리를 시작한 20여년 동안 봐온 월동무 가운데 가장 작았다. 폭염과 가을장마로 무 씨앗의 파종 시기가 늦었던 게 원인이다. 가격도 올랐다. 제주농산물수급관리센터 자료를 보면, 올해 1월 월동무는 지난해에 견줘 190%나 비쌌다. 제주는 겨울에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한반도 유일한 곳이어서 전국 월동무를 책임지는 지역이다.
가격이 올라도 월동무를 살 수 있는 게 다행인 셈이다. 만약 봄에 제주 월동무가 나오지 않는다면 봄김치를 어떻게 담글 수 있을까? 제주의 감귤과 무뿐 아니라 강원의 배추, 경북의 사과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5월 말, 때 이른 무더위에 까먹는 새콤달콤한 세미놀이 마냥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