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는 이견과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책임을 회피할 때 쓰는 완곡 어법으로 굳어진 지 오래됐다. 대선 과정에 차별금지법과 관련해 이 말이 다시 등장했다. 사람을 성별, 장애, 연령, 학력, 종교, 고용, 인종, 성적 지향, 성 정체성 등에 따라 차별하지 않도록 하는 법이다. 많은 나라가 채택했고, 유엔도 한국에 입법을 권고한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가 대선 후보 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견해를 물었다. 이 후보는 “그 방향으로 가야 하지만 지금 그 논의를 하면 갈등이 심화되고 당장 해야 할 시급한 일들을 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정부 입법예고 이후 20년 가까이 논의됐다. 법안 11건이 ‘사회적 합의 부족’을 이유로 폐기됐지만, 시민의 인식 차원에서는 합의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20년 국민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88.5%가 차별금지법에 찬성(찬성하는 편 50.8%, 매우 찬성 37.7%)했다. 50% 안팎의 지지로 대통령이 되는데, 88.5%라면 그야말로 ‘압도적 합의’ 아닌가.
이 후보는 “가치지향적인 문제도 중요한데, 당장 생존의 문제가 더 급하다”고 부연했다. 하지만 차별받는 당사자에겐 이것이 생존의 문제이다. 차별을 줄여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 의욕을 갖고 경제활동에 참여한다면 국가 경쟁력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가 주저하는 이유는 극우의 공격과 선동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차별금지법하에서 조두순 같은 전과자가 초등학교 수위를 해도 막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도 음주운전자도 차별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식으로 법 취지를 왜곡하며 흠집내기에 주력했다. 차별금지법의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한다”는 단서를 무시한 억지이다.
차별금지법 반대 쪽이나, 유보 쪽이나 모두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데 대한 보수 기독교계의 반대를 의식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대선 국면에 현실적으로 보수 종교계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려워 차별금지법 언급 자체를 자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극우 집회를 이끈 손현보 세계로교회 목사는 주간경향 인터뷰에서 “이재명이 되더라도 그분이 정치를 잘한다면, 그리고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모종의 동맹이 성립한 것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보수 기독교계는 지난해 10월27일 서울광장에서 20만명이 참가한 ‘반동성애’ 집회를 열었다. ‘거대한 혐오 표출의 장’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 집회는 탄핵 정국 내내 극우의 동력이 됐다. 교회가 반동성애 기치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팬데믹을 거치며 예배 참석자가 격감하자 내놓은 자구책이라는 분석(이상철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이 있다. 그동안 ‘반공주의’를 구심점으로 삼았지만 소구력이 약해지자, 성소수자라는 다른 혐오 대상을 찾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새로운 권리관계와 재정 지출을 수반할 수 있는 법률이기에 사회적 논의가 필요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공론장을 만들 시도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는 연금개혁이나 노사관계를 놓고 ‘사회적 합의기구’를 만든 노력의 10분의 1도 기울인 적이 없다. 정치에서 차별 문제는 시급한 의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대중의 요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치가 그것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탄핵을 거치며 어느 때보다 강해진 극우 반지성주의를 보면 이 문제에 손대는 것 자체가 꺼려질 것이다. 하지만 소수의 극단적 목소리가 모든 걸 쥐고 흔드는 상태를 방치할 수는 없다.
참고할 사례도 있다. 무작위로 뽑힌 시민들이 동성혼 합법화 등을 놓고 숙의한 아일랜드 시민의회이다. 독일 언론인 바스티안 베르브너의 <혐오 없는 삶>(2021)에는 ‘모든 동성애자는 소아성애자’라고 믿었던 50대 남성 노동자와 보수적인 아일랜드 사회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20대 남성 동성애자가 시민의회에 참여해 얼굴을 마주하고 토론하면서 상대에 대해 ‘같은 인간이구나’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 과정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생각이 서로 다른 시민들이 더 빈번한 접촉을 통해 편견, 두려움을 극복하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다양한 실험을 보여준다. 시민의회는 그 수단 중 하나이다.
이 후보가 ‘사회적 합의’라는 말 뒤에 “그것을 만들기 위해 힘을 보태겠다”고 덧붙이면 좋겠다.

손제민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