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항쟁이 분단을 막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통일운동이었다면, 백범 김구의 남북협상은 분단을 막기 위한 위로부터의 통일운동이었다. 1949년 6월 반민특위 습격, 국회 프락치 사건, 백범 암살로 이어진 ‘6월 공세’는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중심으로 한 분단 세력이 일으킨 친위쿠데타였다.
식민지 지배와 분단과 군사독재의 삼중고를 당하면서도 이 땅의 시민들은 소설 <파친코>의 선자처럼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며 ‘중꺾마’를 잃지 않았고,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살암시민 살아진다”의 삶을 저마다 살아냈다. 이런 이들이었기에 여의도에서 시민들이 계엄군보다 더 빨리 국회에 달려가는 기적을 이룰 수 있었고, 힘없는 사람들의 조건 없는 연대를 통해 ‘남태령 대첩’을 거둘 수 있었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이토록 도와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이 산 자를 도울 수 있던 것은 산 자들이 끊임없이 그 죽음을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왔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 과장한다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절반은 장례식과 추모식과 위령제 아니었던가? 그 시절 우리는 산산이 부서진, 허공 중에 흩어진 이름들을 끊임없이 목 놓아 불러왔다. 그리고 12월3일 밤 그들이 왔다. 우리를 도우러 .
예나 지금이나 내란 세력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연결을 막아왔다. ‘뼈도 못 추린다’는 말이 어디서 나왔겠나. 민간인 학살의 유해는 이승만이 권좌에서 쫓겨날 때까지 10년간 방치돼 있었다. 이승만 세력은 죽은 백범조차도 너무너무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반민특위 해산의 주역이었던 서울시장 김태선은 1956년 백범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의사와 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선생 등의 묘소를 밀어내고 이곳에 효창운동장을 만들려 했다. 나이 든 축구팬들의 애환이 서린 효창운동장은 이런 불순한 의도로 건설됐다. 김창숙, 이명룡 등 독립투사들이 통곡하며 불도저 앞에 드러누워 간신히 묘소는 지켰지만 묘소 턱밑까지 축구장이 들어서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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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몹시 싫어했던 박정희는 이승만을 지우기 위해 이승만 동상이 서 있던 우남광장을 백범광장으로 바꾸고 백범의 동상을 세웠지만, 정작 백범의 묘소는 방치했다. 노무현 정권에 들어와 비로소 효창공원을 독립공원으로 성역화하는 방안이 논의됐으나 정권교체로 무산됐고, 문재인 정권에서도 ‘효창독립100년공원’ 계획이 추진됐으나 친일내란 윤석열 정권은 이를 백지화했다.
계엄령의 충격에 가려져 그렇지, 내란 세력이 오랫동안 독립과 민주의 역사를 부정하는 역사 왜곡을 벌여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란의 진압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독립운동, 평화통일운동, 민주화운동이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분명히 하는 일이기도 하다. 백정과 범부,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온갖 소수자들이나 자기 몫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주인이 된 문화강국이야말로 여의도에서, 남태령에서, 광화문에서 우리가 간절히 바란 ‘다시 만난 세계’의 모습이 아닐까? 효창공원은 문화강국의 비전을 제일 먼저 제시한 백범 선생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진짜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게 효창공원은 거듭나야 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