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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없는 코끼리

입력 2025.05.25 20:39

수정 2025.05.2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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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졌다. ‘왜 코가 없지?’ 코끼리의 몸을 아무리 더듬어도 내 손끝은 눈을 감기 전 보았던 ‘코 없는 코끼리’의 형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치 내 모든 감각이 시각 속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정답을 적었는데도 자꾸만 틀렸다고 하는 이상한 시험문제를 푸는 것 같았다. 처음 느끼는 막막함이었다.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는 ‘본 것’ 대신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작품으로, 시각 예술이면서도 시각 중심의 감각을 전복시킨다. 작가는 시각장애인이 손끝으로 코끼리를 이해했던 경험을 조각으로 복원해 시각에만 의존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 시각을 차단해야만 알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해 말한다. 감각의 체계가 다르기에 낯선 상상과 새로운 통찰이 있는 세상, 타인이 되어보지 않고도 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세상, ‘코 없는 코끼리’가 인도하는 그런 세상을.

코미디언들이여 저항하라

‘토론’이라는 형식에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내가 본 토론을 토론이라 부를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출연자끼리 서로 인신공격을 한 뒤에 잘 버틴 사람한테 상금을 주는 퀴즈쇼에 가깝지 않나. <SNL KOREA>는 몇주 전 열렸던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토론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콩트로 옮겼다.

한국 코미디언들은 업계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정치인 토론회 금지’를 추진해야 한다.

심드렁한 얼굴로 TV를 봤다. 토론도 유세의 일종이라지만 이들은 다른 후보의 지지자를 포섭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모두 자기 땅의 경계에 빗장만 잠근다. 지지자들이 좋아할 공격만 상대에게 퍼붓고, 지지자들이 좋아할 말만 골라 하면서. 이는 분명 지금 우리가 겪는 사회의 분열을 돌이킬 수 없다는 판단이 전제된 토론이다. 이해는 된다. 그 분열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후보자가 버젓이 있는데 누가 그것을 봉합하자고 먼저 제안하겠는가.

이 코미디 같은 대선에서 가장 웃기는 사람은 이준석 후보다. 40대인 그는 왜인지 자신을 ‘2030 남성의 대변인’이라 소개하며 토론에서 다양한 발언들을 쏟아낸다. 이 후보는 군 복무, 취업, 주거에 관련된 공약의 대상을 젊은 남성들에 한정하며, 우리 사회의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주의’를 척결하고 공정성을 되찾겠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가 말하는 ‘공정한 사회’는 다른 신체, 다른 계급, 다른 인종, 다른 성별,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도태시키고, 그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회다. 이것은 그냥 중세로 회귀하자는 얘기인데 ‘새로운 대통령’을 운운하니 웃지 않을 방도가 없다.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후보 중 하나인 권영국도 이준석 못지않게 웃기는 존재다. 인생의 절반을 혐오당하는 이들을 변호하며 살아온 그는 ‘혐오가 뭔지 설명하라’는 인간과 마주하는 굴욕을 견디면서 내란 동조 세력에게 레드카드를 들이밀고, 손바닥에 ‘임금 왕’ 대신, ‘백성 민’을 써 괴짜 같은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그가 내걸고 있는 ‘차별 없는 나라’라는 문장도 웃기지 않나. ‘지금은 이재명’ ‘정정당당 김문수’ ‘새로운 대통령 이준석’, 이런 거룩한 슬로건들 사이에서 ‘차별 없는 나라’라니. 얼마나 자질구레한 구호냔 말이다.

게다가 자기 세력을 조금이라도 늘려야 할 이 촉박한 상황에서 여성, 노동자, 이주민, 장애인, 성소수자같이 표본 밖에 존재하는 이들의 이름을 불러 기어코 함께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으니 권영국 역시 타고난 희극인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 코미디가 되어버렸으니 다음 대선부터는 토론 대신 아예 ‘몰라요 게임’ 같은 걸 하면 어떨까. 모든 후보가 토론에 앞서 ‘내가 모르는 것’을 최소 세 가지 이상 고백하는 거다. “나는 청년들의 노동 현실을 모른다” “나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지방 경제의 어려움을 모른다”. 실현 가능성이 아예 없는 제안이란 걸 알지만,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고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수상한 태도가 난무하는 토론보단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다 함께 질문하는 쇼가 훨씬 재미있지 않겠나.

모르는 게 많은 대통령을 원한다

코미디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는 ‘내 집단 밖으로 경계를 얼마나 넓힐 수 있느냐’일 것이다. 좁은 집단 안에서만 작동하는 코미디는 타인을 배척과 경쟁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나르시시즘에 불과하고, 그 폐쇄적인 타기팅 탓에 수명이 빨리 닳는다. 정치와 코미디가 비슷한 기능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정치인들은 이 시점에 ‘나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질문해 빗장을 풀고 세상의 경계를 넓혀야 한다. 광장이 호명한 미래의 대통령은 모든 것에 답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무서움과 두려움이 많지만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 모르는 것이 많지만 그것을 모두 함께 알아 나가자고 제안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복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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