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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의 추억

입력 2025.05.27 20:57

[송혁기의 책상물림]각하의 추억

“사륜각 아래 문서 더미 고요하고 종고루 안의 물시계 더디 가네. 홀로 앉은 황혼에 누가 내 벗 될까, 자미화만이 자미랑을 마주하는구나.”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중서성 관원으로 근무할 때 지은 시다. 사륜(絲綸)은 왕의 조서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왕명을 관장하던 중서성 건물을 사륜각이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이곳에 자미화를 많이 심었기에 자미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혼자 야근하며 자미화와 마음을 주고받는 시인의 고즈넉한 풍경이 담긴 시다.

각하(閣下)라는 말은 본래 사륜각 같은 관청 건물의 아래를 뜻한다. 서신 말미의 수신인 뒤에 써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여 격식을 차리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비슷한 의미인 합하(閤下)와 함께 점차 고위 관료에 대한 호칭이 됐다. 황제의 호칭인 폐하(陛下), 왕의 호칭인 전하(殿下)와 함께 상하 위계가 분명하던 시대에 쓰이던 말이다.

각하는 한자 문화권의 외교 현장에서 상대국의 고위 관료에 대한 호칭으로도 빈번하게 사용됐다. 그런데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내는 서계에서 조선 왕을 전하가 아니라 각하라고 호칭해서 문제가 됐다. 사신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수정되긴 했으나, 명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하던 일본이 조선 왕을 어떤 위상으로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훗날 일제강점기 총독의 호칭이기도 했던 각하가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호칭하는 말로, 그것도 독점적으로 자랑스럽게 사용된 것을 여기에 비추어 떠올리면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단면이 드러나는 듯하여 씁쓸하다.

한때 호칭을 넘어서 모든 공적 문서의 ‘대통령’ 뒤에 따라붙는 말, 붙이지 않으면 불경의 혐의를 받는 말이었던 ‘각하’는, 이제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로 잊혀가고 있다. 특정 대통령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은 호칭으로 여전히 선호하는 분들도 있지만, 굳이 각하를 붙여야 그 마음이 담기는 건 아닐 것이다. 정무에 온 힘을 쏟는 사이 여가에 배롱나무꽃 만발한 ‘각하’에서 잠시 성찰의 여유를 찾는 대통령을 정겹게 호칭하는 말로 사용된다면 물론 나쁠 것 없긴 하겠다.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두고 벌어지는 시끄러운 풍경들에 잠시 눈과 귀를 닫고 싶은 심정에 던지는 싱거운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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