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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지지 않는 것

장마다. 올해도 폭우가 예상된다는 예보에 겁부터 난다. 작년 이맘때쯤, 반려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비가 샜다. 천장에서 주룩주룩. 할머니 소유였던 가게에 카페를 차린 지 3년이 되어간다. 엄마가 평생 장사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람으로 치면 일흔 살 노인쯤 될 것이다. 한때는 번화가의 중심이었고, 이제는 구도심 끄트머리에서 조용히 늙어가는 곳. 사람도 공간도 노화는 어쩔 수 없다.

반려인은 이 낡은 가게가 품은 시간과 이야기가 프랑스적이라고 했다. 그는 100년 된 집과 그보다 더 오래된 숲에서 자랐으니까. 하지만 이 프랑스 남자도 천장에서 비가 쏟아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폭우가 쏟아질 때마다 마음이 불안하다. 보수 공사를 했지만, 비 오는 날이면 물이 샜던 자리에 꼭 양동이를 두고 퇴근한다. 카페 한가운데에 놓인 양동이. 내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어릴 때, 마당이 빗물에 잠기는 일이 있었다. 골목에서부터 구정물이 강물처럼 흘러 들어왔다. 마당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 동네 사람들의 고함이 들렸다. 그때 할아버지가 양동이를 들고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물은 퍼낸 만큼 어김없이 다시 차올랐지만, 나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분명히 봤다. 할아버지가 물을 퍼내는 동안 비가 멈추고,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그 모든 일을 작은 양동이가 해내는 것을.

마당에 차오른 빗물이 양동이의 몫이었다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은 바가지의 차지였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비가 샜고, 비 오는 날이면 엄마는 비설거지를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집 안, 덩그러니 놓인 파란색·분홍색 바가지. 왜 바가지는 늘 그렇게 촌스러울까. 어디에 놓여 있어도 거슬리는데, 특히 방 안에 놓이면 고단해 보이기까지 한다. 딱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을 받아내고 있을 뿐인데. 그때 엄마의 얼굴도 바가지를 닮았던 것 같다. 벌겋거나 시퍼렇거나 고단하거나. 그래도 엄마는 그 못생긴 바가지 밑에 깨끗한 수건을 단정하게 접어두었다. 또 물방울이 튀거나 습기로 눅눅해진 자리를 마른걸레로 닦고 또 닦았다. 삶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불행에 우왕좌왕하지 않으려 입을 꼭 다문 채 반복하던 걸레질.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엄마는 늘 말없이 불행이 떨어진 자리를 닦았다. 비가 멈추듯 그 불행들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비가 무섭게 내리기 시작한다. 아직 비가 새는 곳은 없지만, 내 안에 습관처럼 남아 있는 두려움이 있다.

어디 무서운 게 비뿐이겠는가. 인과관계 없이 찾아오는 삶의 불운은 나를 종종 무력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고 다치고 싶지 않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들. 그럴 때 나는 무엇으로 두려움을 퍼내고, 받아내고, 닦아내야 할까. 지금 나는 내 삶의 크기에 꼭 맞는 양동이와 바가지를 찾는 중이다. 아니,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비가 그치고, 젖은 것들이 마르고, 망가진 것을 다시 고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나를 키운 이들이 그랬듯, 나 역시 이 삶을 살뜰하게 가꾸며 지키리라는 확신. 그래, 그런 것은 쏟아지는 비 앞에서 양동이와 바가지와 걸레를 손에 쥐어본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유진 작가

신유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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