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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부처였던

[정지아의 할매 열전]알고 보니 부처였던

100살 엄마의 머릿속엔 100년의 기억이 뒤엉켜 있다 어느 순간 아무 기억이나 불쑥 솟구치는 모양이다. 어느 날 아침, 뜬금없이 물었다. “아이, 규갑이는 살았다냐 죽었다냐?”

규갑이가 누군지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게 누구냐고 되물었다.

“규석이 동생이제.”

그제야 기억이 났다. 엄마가 규갑이라 부르는, 전남편의 먼 피붙이를 나는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그냥 중학 시절의 집 주인아저씨다.

그 집에서의 기억이 모든 집을 통틀어 가장 비참했다. 그래서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 주인집과 벽에 지붕을 얹어 간이로 지은 그 집엔 창문도, 화장실도 없었다. 방문을 열면 견고한 벽이 아니라 반투명 비닐로 겨우 바람만 가린 부엌이었다. 그 무렵 나는 장염을 앓았고, 주인집의 현관문은 밤 9시면 잠겼다. 시도 때도 없이 배가 아팠던 나는 별수 없이 부엌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급한 불을 꺼야 했다. 부엌에서 뒷일을 처리해야 하는 서글픔보다 더 서글펐던 건 반투명 비닐 밖으로 어른거리는 주인집 아들 방의 불빛이었다. 하필 그 아이는 나와 나이가 같았다. 그 시간에 담벼락 전망뿐인 창문을 열 리는 만무했지만 나는 그 아이 앞에서 늘 벌거벗은 느낌이었다. 가느다란 기억의 끈을 오랜만에 부여잡은 엄마가 덧붙였다.

“규갑이가 우리헌테 참말로 잘했다. 우리가 하도 쫓게낭게 즈그 집으로 오라드라. 덕분에 거개서 오래 살았제.”

나는 까맣게 모르는 이야기였다. 걸핏하면 형사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통에 서울로 이사 간 뒤 한집에서 오래 살지 못했다. 규갑이 아저씨 집에서만 3년 가까이 살았다. 그게 아저씨의 배려였던 모양이다. 빨갱이를 자기 집에 들이는 게 어찌 쉬웠으랴.

아저씨 집에는 시조카들이 수시로 얹혀살았다. 그 집에는 수세식 변기가 있는 욕실이 있었지만 시조카들은 나처럼 야외 수도를 썼다. 아침에는 밥 지으려는 엄마와 나와 시조카 두엇까지 늘 북적거렸다. 야외 수도를 쓰는 동지여서일까, 시조카들은 나를 예뻐했다. 어린 나이에 출근해야 하는 처지이니 더 급했을 테지만 기꺼이 나를 위해 양보해주었다. 다이얼 비누를 처음 써본 것도 그 언니·오빠들 덕분이었다. 다이얼 비누로 세수를 하면 얼굴에서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신문물의 감각이라고나 할까?

밤 9시 전, 주인집 화장실에 가면 야외 수돗가에서는 맡을 수 없는 향기가 났다. 남의 변기에 앉은 채 나는 매의 눈으로 비품을 살폈다. 우리 집 수건보다 두 배는 두툼한 듯한 송월타월, 써본 적 없는 아카시아 샴푸, 그때의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나는 가닿을 수 없는 세상의 증표였다. 그런 증표를 나는, 시조카들은, 쓸 수 없었다. 일부러 못 쓰게 한 것도 아닐 텐데 나는 괜스레 아주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시조카들이 한겨울에도 욕실을 놔두고 수돗가에서 씻는 것 역시 아주머니가 눈치를 주었기 때문일 거라 지레짐작했다. 머리 굵은 중학생이랍시고 저런 게 소시민성이려니, 내심 비웃은 적도 있다.

엄마가 규갑이 아저씨 얘기를 꺼낸 날 마침 아저씨 형의 딸, 그러니까 나와 수돗가 동지였던 언니가 찾아왔다. 이만저만 해서 아주머니를 원망했었노라 털어놨더니 언니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가, 짝은어매 참말 좋은 사람이어야. 니도 생각해봐라. 울 아배가 빨갱이로 찍힌 사램인디, 고것만 해도 딱 짤라불고 싶었을 것인디, 우리들 다 받아줬어야. 짝은어매, 몸도 약허디 약허다. 그 몸에 자기 자석 너이에 우리꺼정 월매나 고됐을 것이냐. 긍게 노상 울쌍이긴 했어도 우리헌티 모진 말 한 번 안 했어야. 우리가 알아서 눈치 보고 그런 것이제. 나넌 서이는 고사허고 한나도 안 받는다. 시조카가 뭐라고 내 집서 묵에살릴 것이냐!”

언니 말이 옳다. 내 자식 하나 키우기도 힘들다고 죽는소리 해대는 요즘이다. 자식 넷에 시조카 셋, 멀고 먼 빨갱이 친척인 우리까지, 생각해보면 아주머니가 진짜 부처다. 내 상처만 쓰라려서 지금껏 아주머니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막둥이가 나보다 예닐곱 살 아래였으니 이제 아주머니도 90을 바라보는 할매가 되었겠다. 묵은 원망이 마음을 막아 여태 연락할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다. 이제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 것 같다. 주어진 삶이 몸에 부쳐 노상 찌푸리고 있던(어린 나는 우리에 대한 거부로 읽었던) 아주머니가 처음으로 그립다.

정지아 소설가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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