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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여성들의 또 다른 전쟁

입력 2025.06.25 21:17

수정 2025.06.25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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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음력 5월26일, 반가운 얼굴이 새벽 댓바람부터 김광계를 찾았다. 한양을 다녀온다기에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김시익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지 채 4개월이 지나지 않은 터라, 한양 상황이 궁금했던 김광계로서는 그의 방문이 유난히 반가웠다. 그러나 김시익이 전하는 한양 상황은 전쟁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영남 사람들로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채 진행됐던 공성전 기간 동안, 조선 최고 도시 한양은 청나라 군대의 직접적 약탈 대상이 됐다. 기와나 초가를 가릴 것 없이 모든 건물이 불탔고, 이로 인해 전후 넉 달이 지나도록 온전한 양반집 하나를 찾기 힘들 정도라고 했다. 미처 피란길에 오르지 못한 많은 사람은 생사를 달리했고, 젊은 부녀자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됐다. 여성을 전리품으로 여겼던 전쟁 문화로 인해, 청나라 군인은 눈에 보이는 대로 여성들을 납치했다. 그들은 납치한 일부 부녀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고, 청나라로 끌고 간 후에는 몸값을 받고 팔았다.

다행히 납치당했다가 도망친 부녀자들도 있었다. 청나라로 끌려가는 일은 면했으니 다행이기는 했으나, 이들을 기다린 것은 납치되기 전의 일상이 아니었다. 잡혔을 때 정조(貞操)를 잃었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부분의 도망친 부녀자들은 그들의 남편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렇다고 갈 곳 잃은 이들을 친부모가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출가외인이라는 명분에 따라 정조를 잃은 친딸에 대한 책임까지 출가한 집안에 떠넘겼다. 평생 남성 중심 공동체에서 보호만 받았던 양반가 부녀자들일수록 이러한 상황에 내몰릴 가능성이 컸다. 갈 곳 잃은 도망친 부녀자 중 일부는 길거리로 내몰렸고, 그들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길거리 여자로 전락했다. 이제 이들은 그 이전 신분과 상관없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범할 수 있는 대상이 됐고, 실제 양민과 천민들까지 그들을 범할 정도였다. 이들 입장에서는 군복을 입은 청나라 군인들보다 길거리를 활보하는 조선의 남자들이 더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론 청나라 군대에 납치됐을 때도 지옥 같은 삶이었겠지만, 이를 피해 도망친 현실은 그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처음에는 한성부와 형조에서도 양반가 부녀자들을 범한 양민과 천민들을 잡아들이는 듯했다. 물론 부녀자 보호보다 신분제 질서는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피해 여성들 대부분이 자신을 범한 남성들의 범행을 부인하면서, 가해자 처벌도 쉽지만은 않았다. 청나라 군인들도 아닌 조선의 양민이나 천민들로부터 겁간을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행여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리라는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군인들에게 납치당했다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현실인데, 길거리에서 겁간을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들이 ‘화냥년’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김광계, <매원일기>)

여성들은 자신들이 결정하지 않은 전쟁으로 남성들과 같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한 지옥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전쟁을 ‘함께’ 겪었다고 믿었던 가족이라는 이름의 남성들 역할이 컸다.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인 2025년 6월25일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의 포성이 이어지고 있다. 이 전쟁 속에 놓여 있는 대부분의 개인 역시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일로 지옥 같은 삶에 내몰리고, 국민들의 평범한 삶을 보장해야 할 국가는 그들을 배신하고 있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 자체의 목적과 당위를 내세우겠지만, 이를 겪어야 하는 개인 입장에서는 그 어떤 전쟁의 목적과 당위도 그들이 겪어야 하는 지옥을 정당화할 수 없다. 388년 전 오늘, 조선의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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