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 무참, 비운. 사도(思悼)세자 하면 시호처럼 왠지 모르게 떠오르는 이미지다. 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보다 병서를 가까이하고 활과 칼을 즐기는 무인 기질이 많았다. 그런 성품으로 방 안에 앉아 책만 보기는 답답했으리라. 세심하고 꼼꼼했던 영조는 품 너른 아버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들의 행실이 기대에 못 미치자, 심지어 가뭄과 우레도 세자 탓으로 돌렸다. 영조의 끊임없는 질책과 조바심은 결국 세자의 화증을 돋우고 바깥으로 돌게 했다.
1760년 7월 세자는 온양으로 원행을 나섰다. 의관의 건의에 따라 피부질환 치료차 온양의 온천을 찾았다. 온천에서 몸을 회복한 후, 세자는 활쏘기를 했다. 한여름 오후의 뜨거운 햇빛 아래 활쏘기를 마친 세자는 온양군수 윤염에게 활터에 괴목(槐木) 3그루를 품(品)자형으로 심어 그늘을 만들게 했다. 그 후 충청감사 이형원이 그곳에 축대를 만들어 ‘영괴대(靈槐臺)’라 이름 짓고 조정에 보고했다. 정조는 기뻐하며 ‘靈槐臺’라는 친필을 내리고 비를 세우게 했다.
영괴대와 괴목은 그림으로도 그려졌는데, <온궁사실> <영괴대기> <온궁영괴대도>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혼란스러운 것은 괴목의 정체다. 고문헌에 기록된 괴목은 회화나무나 느티나무를 뜻하므로 전후 맥락이나 현장 확인이 중요하다. 일제강점기 영괴대를 찍은 사진 엽서에는 수세가 매우 약해진 느티나무 사진 아래 회화나무의 학명이 표기되어 혼란을 가중한다. 그러나 당시 심었던 괴목의 밑동이 현재 남아 있고, 일제강점기 사진 엽서의 나무는 전형적인 느티나무 수형이므로 괴목은 느티나무가 분명하다. 하지만 <온궁영괴대도>에는 기수우상복엽의 회화나무로 그려져 있다. 이는 괴목을 그린 화가가 현장을 가보지 않고 글자만 해석해 그림으로 남긴 사례다.
나무 이름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나, 영괴대와 느티나무는 사도세자와 관련된 거의 유일한 유적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열렸던 화성 행궁 정문 앞에도 느티나무 3그루가 자라고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온양 행차 후 2년이 지났을 무렵, 1762년 7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그해 여름은 가뭄이 심해 영조는 수차례 기우제를 드렸다. 세자가 비좁은 뒤주에 갇혀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 숨을 거둔 후에도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 우레와 천둥이 빈번하고, 태백성(금성)이 낮에도 출몰한 기록이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나라의 변고가 하늘에 전해졌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