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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박은옥, 시대와의 화해

젊었을 때는 귀에 꽂히는 노래들이 좋았다. 유행가 차트의 수위권을 장식했던 발라드곡들, 가수들이 핏대가 보이는 듯 절정의 고음을 뽐내는 노래들에 끌렸다. 그런데 30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노래들이 부담스러워졌다. 직설적인 가사는 오글거리고, 한없이 올라가는 고음은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노랫말이 들려왔다. 시를 읊조리는 듯한 루시드 폴의 노래들, 에피톤 프로젝트의 낮은 목소리를 좋아하게 됐다.

나이가 더 들어서는 정태춘·박은옥 선생의 노래가 다시 들렸다. 삶의 우수를 한웅큼 품은 듯한 노랫말과 목소리는 남다른 것이었다. 초중고 시절 처음 들었던 ‘시인의 마을’이나 ‘촛불’ 등은 다소 어두운 노래로 기억됐었다. 세상 어려움을 겪고, 삶의 무게를 느끼면서 노래의 깊은 뜻과 정서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탓일까. 수집 차원에서 구매해뒀던 CD를 꺼냈고, 두 사람의 노래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듣게 됐다.

사실 정태춘 선생에 대한 기억이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학 1학년 봄 축제 때였다. 운동권도, 날라리도 아닌 어정쩡한 학생이었던 기자는 친구와 학교 응원단 주최 행사를 찾았다. 응원가에 율동을 곁들이며 흥이 오를 즈음 초대가수 정태춘이 무대에 올랐다. 그는 민중가요를 부른 뒤 “우리가 이럴 때입니까”라며 당시 노태우 정권의 전교조와 노동 탄압 등을 비판하고, 학생들을 꾸짖었다. 분위기는 식었고 풍물패를 앞세운 총학생회가 무대를 점령하며 행사는 중단됐다. 30년이 훨씬 지난 현재도 당시의 생경한 분위기가 기억난다.

이때는 인기가수 정태춘이 사회운동가로 변했던 시기이다. 그는 당시 제도권 매체를 거부하고 전교조·노동운동·학생운동 현장을 찾아다녔다. 그의 사진은 문화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더 많이 등장했다. 최근 복간된 <정태춘>(한울출판사)에 실린 김영철 전 한겨레 기자의 글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노래가 사회변혁의 무기로 쓰이고 투쟁의 도구로 활용된다면 큰 보람이오. 순수한 노래? 그런 건 없습니다.” 집회에서 ‘시인의 마을’ 등을 불러달라는 요청이라도 들으면 “판 사서 들으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사전 검열에도 저항했다. <아, 대한민국…>(1990년),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년) 등 사전심의 없이 제작된 그의 음반들이 공연장과 대학가에서 판매됐다. 사전심의 제도는 결국 1996년 폐지됐다.

민주정부가 집권했지만, 그는 침잠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에도 불편했던 사람들, 절망했던 사람들이 있다. 대중이 몇년 동안 싸운 열매를 누가 가져간 것인가. 자본의 지배로 진입해가고 있었다. 나는 이 문명에서 이탈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2006년 경기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에 반대하는 투쟁 현장에 참여하다 경찰에 연행됐고, 이후 외부활동을 멈췄다.

그가 침묵을 깬 건 2012년 새 앨범(<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을 내면서다. 세상에 의미를 던지는 것만이 아니라 담담하게 노래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박은옥 선생의 설득에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집회에서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는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불렀다. 데뷔 40주년인 2019년 앨범 <사람들 2019>를 내고, 전국 콘서트를 했다. 2022년엔 다큐멘터리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 개봉됐다.

정태춘·박은옥 선생이 새 앨범 <집중호우 사이> 발표를 계기로 열고 있는 콘서트를 최근 관람했다. 인간과 문명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담았다는 새 노래들의 메시지는 묵직하지만, 부드러워진 듯도 했다. “전쟁 같은 폭우 장마에 강물 흐르는 주택가/ 멀리 포성과 섬광이 멎고 문득 지리멸렬해지면/ 그 갯벌 키 작은 갈대 밭 붉은 다리의 어린 농게들이/ 질퍽한 각자의 참호에서 간지러운 햇살 기다리리라.”(‘집중호우 사이’) 노래는 비 그친 뒤 맑게 갠 하늘을 말했다. 두 사람은 야만의 시절 부르기를 거부했다는 ‘시인의 마을’ ‘촛불’ ‘사랑하는 이에게’를 들려줬다.

대통령이 바뀌고 세상도 바뀌었다. 기자보다 이틀 뒤 콘서트를 관람한 지인은 김혜경 여사를 공연장에서 봤다고 했다. 달라진 세상의 징표인가. 정태춘 선생은 음반발매 간담회에서 “나는 내 생각대로 잘 변화해왔다. 나의 변화가 좋았다”고 했다. 그는 세상과 화해할 준비가 됐을까. 두 사람이 서정적인 노래를 기꺼이 만들고 들려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이면 좋겠다.

이용욱 문화에디터 겸 문화부장

이용욱 문화에디터 겸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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