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볼 때 우파는 프랑스 혁명 이후 세워진 민주공화제를 반대하는 세력에서 출발한다. 우파는 주장한다. 만인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시민이라 주장하는 민주공화제는 인류가 이룩해놓은 위대한 문명을 악한 신분제라며 파괴했다. 공교육을 통해 인민을 하향 평준화된 우중으로 전락시켰다. 성과를 내려면 경쟁해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합당한 보상을 배분해야 한다. 이로 인한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
좌파는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공화정을 찬성하는 세력에서 나왔다. 좌파는 말한다. 신분제로 대표되는 불평등은 인간 본성에 어긋나게 잘못 구성된 사회 제도의 산물이다. 가변적인 인간 본성에는 평화, 자유, 정의, 복지의 확립을 방해하는 어떤 본질적인 속성도 없다. 온갖 사회 문제는 무지와 잘못 설계된 제도의 결과다. 시장, 국가, 가족, 종교, 학문과 같은 제도를 평등하게 재설계해서 실천하면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우파와 좌파는 현대 정치를 대표하는 두 세력으로 길항 관계를 형성하며 발전해왔다. 우파 정치는 수월성 추구를 통해 끊임없는 혁신을 이루고 하향 평준화된 포퓰리즘의 폐해를 막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좌파 정치는 민주주의 추구를 통해 성, 계급, 인종, 문화 등과 같은 사회적 범주에서 소수자의 자리를 점한 사람들을 온당한 시민으로 포용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지난 40여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시행한 결과 극단적인 우파와 좌파가 큰 세력으로 등장했다. 기존의 자유주의 가치와 제도가 도전받으면서 ‘극우 정치’와 ‘정체성 정치’의 극단 대결로 재편되고 있다.
극우 정치는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퀴어 이론, 탈식민주의와 같이 역사적으로 소외된 집단의 평등을 증진하려는 노력을 격렬하게 공격한다. 이런 이념과 관련 정책이 일반 노동자의 귀중한 자원을 빼앗아간다며 증오와 혐오를 부추긴다. 소수자 권리와 정체성에 맞서 다수자 권리와 정체성을 지키자고 주장한다.
정체성 정치는 자유주의 가치와 제도가 겉으로는 보편적 평등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소수자의 정체성을 억압해왔다고 비판한다. 겉만 자유주의 가치를 체화한 제도는 소수자를 문화적 제국주의, 폭력, 착취, 소외, 무력감에 취약하게 만든다. 소수자는 지배 문화가 제시하는 부정적인 각본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아감과 공동체 의식을 변화시키는 독자적인 정체성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유럽의 정치적 현실은 극우 정치와 정체성 정치가 대립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상대방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유주의 가치와 제도를 극우 정치는 ‘허위’로, 정체성 정치는 ‘부정의’로 낙인찍어 공격하고 파괴한다. 엘리트주의 우파가 증오와 혐오라는 포퓰리즘적 정치 수사를 사용해 사회적 삶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포퓰리즘 좌파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엘리트주의적 정치 수사를 활용해 사회적 삶을 도덕적으로 얼어붙게 만든다. 우파-엘리트주의와 좌파-포퓰리즘의 쌍이 해체되어 우파-포퓰리즘과 좌파-엘리트주의가 새로운 쌍으로 나타난다.
앞으로 한국 정치가 극우 정치 대 정체성 정치의 극단 대립으로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이를 막으려면 자신의 꿈, 열망, 이해관계를 민주주의 담론을 통해 표현·실천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키워줘야 한다. 민주주의는 근대 서구에서 수입된 가치와 제도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가 교류하면서 수천년 동안 함께 만든 위대한 문명의 공동 유산이다. 문명사적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하려면 고전 교육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고전은 인류가 공동으로 의지할 수 있는 보편주의 언어다. 이를 배우지 못하면 극단적인 특수주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살아가는 극우 정치와 정체성 정치가 득세한다.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