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서동진은 우리가 악순환에 갇혀 있다고 지적한다. 광장의 정치가 조직한 힘을, 집권을 위한 에너지로 탕진하며 다시 아무런 사회적 구조 전환이 없는 정권교체를 위한 자원으로 소모하는 악순환을 말한다.
지난 수십년간 제도 정치 내에서 발생한 정치 세력 간 교착상태(집권 세력의 정치적 정당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광장의 정치가 동원되지만, 결국 희망과 기대를 ‘배반’당하고 정치적 행위의 최종 결과가 정권교체로 귀결되는 반복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배반일까? 그렇다면 희망과 기대를 배반당하지 않기 위해 요구와 관철의 강도를 높이고 전략을 달리하면 될 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반은 광장 주체와 요구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필연적이다. 모든 것이 즉각 수용될 리도 없지만, 모든 것을 수용할 수도 없다. 이미 광장의 핵심 의제였던 차별금지법은 ‘경중선후’의 논리로 배반당할 위기에 처했다.
우리가 처한 반복의 불행은 수용과 배반을 넘어선다. 광장은 제도 정치의 균열 틈새로 폭발하는 급진화 요구와 인민이 얼굴을 드러내는 본래 의미의 ‘정치’가 벌어지는 장소다. 그럼으로써 광장의 정치는 기존 체제의 모순이나 부정합에 맞서 새로운 사회적 구조를 창출해낸다. 하지만 광장이 모든 에너지를 기존의 질서로 되돌리는 체제의 관리자가 되면서 악순환이 발생한다. 2016년 촛불과 대선 이후 “죽 쒀서 개 줬다”는 허무주의적 탄식은 배반의 결과만은 아니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구호와 의지만 남긴 채 억압돼 버리는 정치의 가능성(새로운 체제의 창출)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광장은 지난 수십년간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며 결국 제도 정치로의 포섭으로 귀결되고 있다. 제도 정치의 기능적 부분이 되고 있다. 물론 광장에서 등장하고 목격되는 새로운 주체, 연대 감각의 회복은 새로운 가능성을 품게 한다. 하지만 넘어서야 할 체제를 끊임없이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기능하거나 집권 세력 간 교착상태 해결에 동원되는 광장 정치의 현실은 우리 운동을 돌아보게 한다.
윤석열이 꿈꾼 것이 ‘자유 없는 민주주의’라면, 우리 사회가 향하고 있는 것은 ‘정치 없는 민주주의’라 하겠다. 새로운 질서를 생성하는 본래 의미의 정치의 보루였던 광장마저 탈정치화하고 있다. 이는 정치의 사법화와 그것의 전 사회적 전이, 정치가 행정으로 치환되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광장을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다. 정치가 사라진 시대에 대한 불안, 사회 전체가 급진성을 상실하고 보수화하고 있다는 불안, 운동의 고유한 역할을 정당과 행정이 포섭해간다는 불안, 운동이 제도 정치의 기능적 부속품이 된다는 불안이 있을 뿐이다. 내란 이후 맞이한 이재명 대통령 시대, 운동의 역할은 무엇일까 고민할 수밖에 없다.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