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이 지난 7일 국회 소통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혁신위원장직 사퇴와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한국의 ‘보수 정치’는 재기할 수 있을 것인가. 6·3 조기 대선과 그 이후를 관통하는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일 게다. 한 사회가 진보·보수 두 날개로 비행한다면 윤석열의 자멸적 ‘내란’과 극우화로 파괴된 보수 정치 복원은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대선 한 달여가 지난 지금 현실은 참패보다 더 뼈아픈 ‘대재앙’이다.
국민의힘의 첫 혁신위원장은 혁신위를 출범키로 한 날(7일) 사퇴했다. 그가 일성으로 “보수 정치의 고름과 종기를 적출하겠다” 했을 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거라 예감했다. 혁신 속내는 ‘1’도 없이 새 ‘표지 얼굴’로 그를 간택한 친윤 비대위가 메스를 쥐여줄 리 만무했다. 그는 당대표가 돼 반드시 ‘인적 쇄신’ 메스를 들겠노라며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했다. 쇄신 대상으로 지목된 이들은 그를 “자리 욕심”에 눈먼 쇄신 대상이라 맹비난했다. 코미디라기엔 피 튀기는 난투극이고, 비극이라 하기엔 헛웃음만 나오는 부조리극이다.
애초 보수 정치 혁신은 새 좌표 위에서 가능하고, 국민의힘의 여정은 그 답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계엄은 “잘못”이라 사과 시늉을 하면서도, 내내 ‘탄핵은 안 된다’ 옥신각신하는 모순투성이 행태를 보면 이 당과 보수 정치가 처한 정신적 착란의 풍경을 실감하게 된다. 그들은 아바타쯤으로 여겼던 윤석열의 ‘내란’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 따른 정치적 대가도 일절 치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현실 부정’은 극우에 공간만 내줘 보수 정치를 벼랑에 서게 만들었다.
‘대재앙’의 전조와도 같았던 지난해 4·10 총선 후 칼럼 ‘총선 참패 여당이 뻔뻔할 수 있는 이유’에서 세 가지를 꼽았다. ‘책임감의 결여’ ‘민생정치 감각의 부재’ ‘업둥이 정당의 체질화’다. 이 ‘무책임·탈민생·몰염치’를 극복할 수 있느냐가 보수 정치 재기의 관건이었다. 그럼에도 업둥이 윤석열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듯 ‘한덕수 차출론’에 목을 매고, 정당사 유례없는 후보 교체 난동을 벌이다 ‘단일화 사기’까지 당한 낮은 지능을 보면 “자업자득”이란 조소조차 과분하다.
한국의 보수 정치는 왜 번번이 실패할까. 고이고 고인 보수 정치의 ‘기득권’이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온다. 해방 이후 한국 정치를 양분한 한 축이 21세기 들어 호남 기반 평화민주당 세력에서 민주화운동 그룹으로, 이제 수도권과 온건중도 전문가들로 변모해갈 동안 보수 정치의 중심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영남을 기반으로 한 관료·엘리트·자본계층의 카르텔은 스스로를 ‘산업화 세력’으로 포장한 채 한 번도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시인 김지하가 1970년 풍자시 ‘5적(五賊)’에서 질타한 기득권 도적들은 ‘재벌·국회의원·고급 관료·장성·장차관’이었는데, 50년도 더 지난 지금 보수 정치 면면과 얼마나 다른가. 이제 그들은 그동안 입었던 ‘친윤’의 겉옷을 슬그머니 벗어던지는 중이다.
그들은 ‘정치는 돈과 조직이 전부’이라는 낡은 정치를 신조로 반세기 넘게 버텨왔다. ‘대세 추종’과 ‘시류 편승’은 처세의 기본 전략이었다. 윤석열처럼 한때 휘몰아치던 것들은 다 사라져도 돈·조직을 꽉 쥔 그들의 기득권 산천은 ‘의구(依舊)’하다 여긴다. 그래서 엎드려 있는 데도 이골이 난 기회주의자들이다. 애초 보수 가치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것조차 사치스럽다.
기득권 보수는 그렇게 고인 채 영남의 울타리로 고립되었고, 정당으로서 능력을 잃었다.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화석’들이 행세하는데 ‘좀비 정당’이 될 수밖에…. 수권능력이 없으니 업둥이를 데려다 매번 간판갈이를 하고 버리는 ‘임시변통’ 정치는 필연이었다. 그들 지능이 낮다 비웃을 게 아니라, 그 처절한 기회주의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이쯤이면 그 정당과 보수 정치의 이념이 “배신 척결”인 것도 놀랍지 않다. 천하 패권 쟁투가 벌어지건 말건, 그들에겐 손바닥만 한 그들 동굴에서 벌이는 당권 난투가 더 중요하다.
보수는 ‘민주공화’ 중에서도 ‘다원적 공동체’가 핵심 원리인 ‘공화’를 더욱 무겁게 여긴다. 법치와 상식으로 국가와 정치의 아랫목을 뭉근하게 데우는 게 보수 정치일 텐데, 그 공간은 기회주의자들의 놀이터가 됐다. 보수 정치가 맞닥트린 ‘대재앙’의 본질이다. 이 기득권 카르텔을 객토하지 않는 한 보수 정치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건 무망하다.
보수 정치 대재앙의 끝은 ‘신세력·신질서’의 태동이어야 한다. 제대로 된 보수라면 기회주의자들을 매몰차게 내쳐야 한다. 그런 결기를 가지고, 일전을 불사하는 정치인을 앞세워야 한다. 부디 ‘보수를 고쳐 쓸 수 있을까’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길 바란다.
김광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