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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만 남기고 사라진 바가지

입력 2025.07.10 21:13

수정 2025.07.1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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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감자 한 알, 달걀 한 알쯤 쪄 두고 점심을 지나고 싶은데 손이 허전하다. 점심거리 무심히 담아둘 바가지 하나가 집에 없다. 바가지는 원래 박을 두 쪽으로 켜 만든 주방용품 겸 용기다. 물·술·장 등을 푸거나 뜰 때 좋다. 감자·고구마·밤·호두·달걀·옥수수처럼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먹을거리를 담아두는 데에도 요긴하다. 나무·쇠붙이·합성수지 바가지도 있지만 액체에 띄워두고 쓰기에는 역시나 원래 바가지가 낫다.

뜨거운 조청이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죽을 풀 때도 역시 박을 켜 만든 바가지다. 바가지는 뜨거운 액체나 음식이 닿아도 녹아내리지 않는다. 열을 전달하지 않아 쥐기에도 좋다. 다 떠나서, 가볍다.

바가지 가운데 서너 명분 음식을 담을 만한 바가지는 ‘가달박’이다. 함지박과는 다르다. 함지박은 통나무 속을 파낸 넓고 무거운 용기다. ‘빨간 고무 다라이’가 태어나기 전에, 고무 다라이처럼 쓴 용기가 바로 함지박이다. 고무 다라이란 곧 합성수지 함지박이다. 함지박은 이고 다녔다. ‘박’이라는 말이 붙었으되 함지박은 바가지는 아니다. 이에 견주어 가달박은 음식을 담고서, 한 손으로는 받치고 한 손으로는 쥐고, 부엌에서 나와 후딱 논밭으로 달려갈 때 쓸 만한 질기고 넉넉하고 가벼운 바가지다.

작게는 조롱박이 있다. 조롱박은 호리병박을 두 쪽으로 켜 만든다. 독에 띄워놓고 쓰기 좋다. 전에는 독의 부피, 아가리의 둘레를 가늠해 바가지든 조롱박이든 띄워놓았다.

이보다도 작은 놈이 표주박이다. 조롱박은 독보다 작은 동이에 띄우기 좋다. 동이는 콩 한 말이 들어갈 만한 부피의 용기다. 동이 절반만 한 용기는 방구리다. 방구리에서 무얼 푼다면 표주박이 마침맞다. 표주박은 휴대용 잔 노릇도 했다. 허리춤에 차기 좋은 데다 앙증맞기까지 하다. 물잔 노릇은 기본이다. 점잖은 사람은 찻잔으로도 쓰고 술꾼은 술잔으로도 썼다. 그러니 그 소재가 호리병박에 그치지 않았다.

잘생긴 소라를 다듬어 가장자리를 금속으로 마무리한 표주박, 종이로 모양 잡고 옻으로 마감한 표주박도 썼다. 나무를 깎아 천도복숭아 반 가른 모양을 내 세공을 올리기도 했다. 서민 부엌에서 방구리와 어울린 표주박과는 다른 표주박이다.

그래도 표주박에 잇닿은 심상이란 요컨대 소박한 생활이다.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이라는 말이 있다. ‘도시락 하나 채울 밥 한 덩이에 표주박 하나 채울 물’이라는 뜻이다. <논어>에서 유래한 이 말은 소박하되 줏대 있는 삶, 소박하되 생활의 즐거움을 잃지 않는 삶을 은유한다.

고전적인 숙어만 의구할 뿐이다. 표주박도 가달박도 간데없다. 한 사물의 소재, 부피 감각, 형상, 미의식 이전에 쓸모에 충실해 이룬 조형미, 생활 속 쓰임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한국 음식 문화사가 겪은 최근 100년의 충격은 도구와 기명에서도 한결같다. 이제 바가지는 없다. 대중소 스테인리스 볼이 있을 뿐이다. 추이보다는 충격을 연속해 이룬 한국 일상생활의 현대사가 새삼스럽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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