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컨설팅그룹, 가자주민 이주비용 모델링”
이스라엘 국방 “‘인도주의 도시’ 건설, 가자 주민 전체 수용”
이스라엘 장교들 ‘국제법 위반’ 청원 제기
이스라엘 전 총리 “강제수용소될 수도” 비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7일(현지시간)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 중 악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21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가자지구 전쟁 휴전 협정이 타결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정작 불거진 것은 ‘가자지구 주민 이주안’이었다.
지난 7일(현지시간) 네타냐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지구 이주안’을 다시 언급하며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하고자 하는 국가들을 찾고 있다. 몇몇 국가를 찾는 데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월 재임 후 네타냐후 총리와의 첫 정상회담을 가진 뒤 “가자지구를 미국이 소유하고, 중동의 리비에라(유럽 해안 휴양지)로 만들겠다”한 제안이 아직 유효함을 시사한 것이다.
같은 날, 이스라엘 카츠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가자지구 남부 도시 라파에 ‘인도주의 도시’를 짓고 장기적으로 230만명 가자 주민을 전부 수용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보안 심사를 거쳐 들어간 가자 주민은 해외로 떠나지 않는 한 이곳을 나올 수 없다. ‘지붕 없는 감옥’에서 영원히 살거나 타국으로 떠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가자지구 중동 리비에라’ 구상은 서방 강대국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지역 주민들을 내쫓고 국경선을 긋던 제국주의 시대에나 가능할 법한 말처럼 들렸다. 민간인의 강제이주는 국제법 위반일 뿐 아니라 전쟁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세계 3대 컨설팅 회사 중 하나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가자지구 주민 이주와 재건 비용을 모델링하는 계약을 수주했으며(파이낸셜타임스· FT), 미국과 이스라엘이 지원하는 가자인도주의재단(GHF) 역시 가자지구 주민을 수용할 대규모 캠프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로이터 통신)는 보도가 나오면서 가자지구 주민 이주 계획이 가시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디언은 “실제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대규모로 강제 이주시킬 구체적 작전 계획으로 확대된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11일(현지시간) 가자지구 북부 칸유니스 지역의 임시 피난 캠프 모습. AFP연합뉴스
대형 컨설팅사 개입···가시화하는 가자주민 ‘강제이주’ 계획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 중 하나인 BCG가 가자지구 주민 이주에 드는 비용을 추산하는 프로젝트를 거액을 받고 수주했다는 FT의 보도는 가자주민 강제이주 계획이 구체적 검토 단계까지 들어갔음을 방증한다. FT는 지난 5일 BCG가 400만달러(약 55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 가자지구 주민 이주와 재건 비용을 추산하는 ‘오로라’라는 코드명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5월까지 7개월간 이뤄진 프로젝트에서 전후 가자지구 주민 이주를 포함한 재건 비용을 시뮬레이션하는 구체적 작업은 지난 4월에 시작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지구 중동의 리비에라’ 구상이 나온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이다.
BCG는 수십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이주시키는 데 드는 비용과 대량 이주가 초래하는 경제적 영향을 추산했는데, 한 시나리오에선 50만명이 넘는 가자지구 주민이 1인당 9000달러(약 1240만원), 총 50억달러(약 6조8885억원) 상당의 ‘이주 패키지’를 받고 가자지구를 떠날 것으로 추산했다. BCG는 이에 대해 내부 승인 없는 비공식 프로젝트였으며, 이에 관여한 두 파트너를 해고했다고 밝혔다.
전직 이스라엘 고위 외교관인 알론 핑카스는 “(BCG가) 타당성 조사를 수행한 바 있기 때문에, 이 계획이 단순한 구상이 아니라 실제 실행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로이터 또한 GHF가 팔레스타인 주민을 가자지구 안팎에 수용하기 위한 ‘인도적 환승지역’을 건설하는 계획을 트럼프 행정부에 제출했고, 백악관 내에서 논의된 바 있다고 지난 7일 보도했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 강제이주는 이스라엘 극우의 오랜 염원이다. 이스라엘의 극우 장관들은 2023년 10월7일 하마스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이후 가자지구 ‘정화’를 요구하며 팔레스타인인 강제추방과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주장했다.
지난 5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가하며 시작한 ‘기드온의 전차’ 작전은 가자지구 점령과 가자 주민 이주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내각이 승인한 작전 계획엔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영토를 유지하는 구상이 포함됐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 들어갔다가 철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츠 장관의 ‘인도주의 도시’ 건설 계획은 이 같은 흐름과 연결돼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를 강력 지지하고 있으며, 이스라엘군이 수용소 건설 지역으로 언급된 라파 지역에서 이스라엘군 철군을 거부하면서 휴전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하레츠 등 이스라엘 언론은 전했다.
지난 7일, 이스라엘 장교 3명은 이스라엘 정부가 ‘기드온의 전차’ 작전을 통해 가자지구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려는 것이 불법 명령이자, 국제법 위반에 해당한다며 대법원에 청원을 제출했다.
지난해 7월 가자지구 남부 칸 유니스의 한 거리에서 한 소년이 파괴된 건물 잔해를 지나 물통이 든 휠체어를 밀고 지나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스라엘 전직 총리도 “강제수용소, 인종 청소” 비판
‘인도주의 도시’ 건설에 대해 인권·국제 전문가들은 국제법 위반이자 ‘인종 청소’에 전쟁범죄라고 한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다.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전 총리는 13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인도주의 도시’는 사실상 강제 수용소이며, 팔레스타인인들을 강제로 수용하는 것은 인종 청소가 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인도주의 도시’가 가자지구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올메르트는 “그들(이스라엘군)이 가자 주민 절반 이상을 ‘정화’하겠다는 계획 아래 수용소를 짓는다면, 팔레스타인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추방하고 밀어내며 버리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인권 변호사 마이클 스파르드는 “이스라엘 정부는 ‘자발적 이주’라고 주장하지만 현재 가자지구 주민들은 탈출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강압적 상황에 놓여 있다”며 “조국에서 사람들을 몰아낸다면 전쟁 범죄이며, 대규모로 실행된다면 인도에 반한 범죄가 된다”고 말했다.
아드난 하야즈네 카타르대 교수는 “모든 조각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을 가자지구에서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자 주민 없는 가자지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비전을 트럼프, 네타냐후가 공유하고 있다”며 “국제법에 위배되는 불법적 행위”라고 말했다.
국제법상 강제이주는 중대한 범죄로 간주된다. 1949년 제네바협약은 전쟁이나 무력 충돌시 점령지의 민간인 강제 이주를 금지하고 있다. 일시적 대피는 허용되지만, 돌아올 수 있는 권리를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시 국제형사재판소(ICC)나 유엔에서 전쟁범죄나 반인도범죄로 기소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강제이주 금지 협약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유대인 강제이주와 인종청소 이후 이같은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제정됐다. 히틀러 정권은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이주시키고, 대규모 학살을 진행했다. 이후 ‘집단학살’ 개념이 생겨나고 ICC가 설립되는 계기가 됐다.
소련의 스탈린 정권 또한 체첸인·타타르인·폴란드계 수백만명을 시베리아·중앙아시아 등으로 이주시켰으며, 1947년 영국의 식민 지배 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1400만명이 종교 때문에 강제이주됐다. 이는 지난 4월 일어난 인도와 파키스탄의 무력 충돌을 비롯한 양국 갈등의 역사적 근원이기도 하다.
지난 10일(현지시간) 가자지구 중부 데이르 알-발라(Deir al-Balah)의 한 의료센터 인근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딸을 잃은 어머니가 아들을 위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가자 주민 “두 번째 ‘나크바(재앙)’ 두려워···가자지구 떠나지 않을 것”
21개월에 걸친 전쟁으로 폐허와 죽음, 굶주림만 남은 가자지구지만 주민들은 강제 이주 계획을 거부하고 있다. 로이터는 가지지구 주민들이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수십만명이 집을 잃고 난민 신세가 된 ‘나크바(재앙)’가 되풀이될까 두려워하면서도 쓰러지고 무너진 집터일지언정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유엔에 따르면 가자지구 주민 80% 이상이 실향민 상태다.
가자지구 주민 아부 사미르 알파카위는 “가자지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내 나라”라며 “우리 가족들, 친구들 모두가 이 땅에 묻혀 있다”며 “트럼프든 네타냐후든, 그 누가 뭐라든 우리는 이 땅에 머물 것”이라고 로이터에 말했다.
가자지구 주민 강제 이주가 이스라엘의 안전한 미래와 평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포린폴리시의 칼럼니스트 하워드 W 프렌치는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폭력적으로 몰아내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라며 “이스라엘이 이런 기반 위에서 안전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은 끔찍한 착각”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