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한국종합농업단체협의회, 한국농축산연합회 등 농민단체 회원들이 미국과의 관세협상을 앞두고 농축산물 개방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미국의 농축산물 개방 압력이 커지면서 쌀·한우 농가 등 농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주요국들이 앞서 미국과 관세 협상에서 농축산물 개방을 조건으로 타결하면서 한국도 일부 시장 개방이 불가피해지는 모양새다. 정부는 가장 피해가 적은 선에서 타협점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쌀은 저율할당관세(TRQ) 물량 안에서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글로벌 쿼터’를 활용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바이오에탄올 등의 수입량을 늘리는 것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한국농축산연합회·농민의길 국내 주요 농민단체들은 28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단순 시장 논리에 입각해 또다시 농축산물을 협상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이는 정부가 5000만 국민의 생명 산업인 농축산업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라며 “전국농축산인은 식량주권 사수를 위한 대정부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관세협상 결과에 따라 단체행동도 예고했다.
정부는 다음달 1일 관세 협상 마감 시한을 앞두고 사실상 미국의 농축산물 개방 압력을 피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이날 브리핑에서 “관세 협상과 관련해 미국 측 압박이 매우 거센 것은 사실”이라면서 “구체적으로 농축산물에 대한 요구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가능한 한 국민 산업 보호를 위해 양보 폭을 최소화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미국과 관세협상을 타결한 국가들은 모두 농산물 개방 조건이 일부 포함돼 있다. 유럽연합(EU)은 이날 일부 농산물에 서로 관세 0%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추가 개방했다. 일본도 미국산 쌀 수입을 확대하기로 했고, 호주 역시 미국산 쇠고기 시장을 전면 개방하기로 했다.
국내 시장을 개방한다면 우선 거론되는 부분은 쌀 시장이다. 미국 측은 현재 매년 13만톤 가량 수입하고 있는 저율할당관세(TRQ) 물량을 늘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41만톤으로 정해져 있는 TRQ 물량은 가공용·사료용으로 주로 쓰여 시장 영향이 적을 수 있지만, 국가별 물량을 바꾸려면 다른 국가들과 추가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점은 걸림돌이다.
이에 41만톤 중 특정국에 배정되지 않은 2만톤 가량의 글로벌 쿼터 물량을 미국 쪽에 열어주는 방안도 거론된다. 농업 관련 싱크탱크인 GS&J 인스티튜트의 서진교 원장은 “(글로벌 쿼터 2만톤에 대해) 수입 쌀 품질 기준을 높게 설정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미국산 쌀 수입을 늘리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도 미국 측이 강하게 요구하는 대목이다. 현재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는 국가는 한국을 제외하면 러시아와 벨라루스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4일 호주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 전면 개방 결정을 이끌어 낸 뒤 “우리 훌륭한 소고기 거부하는 나라 지켜보겠다” 고 언급하며 압박 수위를 끌어 올렸다.
소고기 수입 문제는 축산농가 반발도 있지만 ‘2008년 광우병’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할 수 있어 국민 설득이 관건이다. 월령제한 폐지로 70~80개월령의 가공육이 들어오면 국민 거부감이 커질 수 있다. 향후 국회 심의 과정에서 30월령 이상 쇠고기에 월령을 따로 표시하는 방향 등으로 소비자 안전 장치를 보완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현행 가축법상 미국에서 30개월령 이상 쇠고기를 수입하려면 국회 심의를 받아야 한다.
정부 관계자는 “구이·스테이크용 고기는 월령표기를 요구할 수 있겠지만 아예 구분이 어려운 가공육을 어떻게 할지는 또 다른 문제”라며 “개방이 이뤄지더라도 피해 예측과 지원대책이 병행되지 않으면 국회 승인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쌀·쇠고기 대신 연료용 작물 수입 확대 등 제3의 카드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서 원장은 “쌀·소고기 추가 개방보다는 다른 국가 수입을 줄이는 방식으로 바이오에탄올이나 밀 등 미국에서 수입하는 품목의 양을 늘리는 방안이 가장 국내 농민들 피해가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