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시민들이 현수막과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 | 정유진 특파원
11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수도 워싱턴의 풍경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폭력적인 갱단, 피에 굶주린 범죄자들, 마약에 취한 미치광이, 노숙자들이 점령했다”고 묘사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여느 때처럼 평화롭게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에서 워싱턴의 범죄율이 통제 불능 수준이라고 주장하며 워싱턴 경찰국을 연방정부 통제하에 두고 테리 콜 마약단속국장을 임시 경찰국장으로 임명하겠다고 밝혔다. 컬럼비아특별자치구법은 대통령이 ‘비상상황’이라고 판단할 경우 연방정부가 워싱턴 경찰을 최장 30일까지 통제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주방위군 800명을 워싱턴에 동원하고 필요하면 인원을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 이후 백악관 앞에는 팻말과 현수막을 든 1인 시위자들이 늘어났다. 성조기 무늬 옷을 입은 여성이 활짝 펼쳐 든 현수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워싱턴에서 범죄자를 쫓아내겠다고? 그러면 엡스타인 파일 (조사)부터 시작하라.’ 자신을 네이든이라 소개한 이 여성은 기자회견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이 직접 만든 현수막이라고 말했다. 네이든은 격앙된 목소리로 “범죄자는 바로 트럼프”라면서 “수십 건의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범죄율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소리를 높였다.
네이든은 “워싱턴에서 벌어질 ‘범죄와의 전쟁’에선 결국 흑인 청소년이 표적이 될 것”이라면서 “백인 청소년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아이의 미래를 망쳐선 안 된다’며 넘어가지만 흑인 청소년은 14세만 돼도 성인 취급을 받는다”고 우려했다.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시민들이 현수막과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 | 정유진 특파원
네이든 옆에는 또 다른 남녀가 ‘이민세관단속국 반대, 주방위군 반대’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었다. 난민 지원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케이트는 “트럼프 정부가 군 투입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워싱턴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는 시민과 이주민을 납치하려는 행동과 다를 바 없다”면서 “파시스트 정권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한국이 했던 것처럼 더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오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흑인과 이주민이 주요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이들의 우려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워싱턴 범죄자의 상당수는 애초에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어야 할 사람들”이라면서 “그들은 베네수엘라 출신이고 세계 곳곳에서 왔다”고 언급했다. 또 전국노숙인법률센터는 이날 성명을 내고 “트럼프 대통령이 쫓아내겠다고 한 워싱턴 노숙인의 85%가 흑인이라는 점에서 이는 의도적”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예고대로 워싱턴 시내에 주 방위군이 배치되면 시민들의 반발은 더욱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은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이 7%가량에 불과했을 만큼 친민주당 성향이 강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팸 본디 법무장관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날 기자회견에 배석한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주 방위군이 수주 안에 워싱턴 거리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특수부대도 투입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방위군 투입이 다른 도시로 확산할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 “뉴욕, 시카고, 볼티모어 등의 상황도 심각하다”고 말했다. 그가 거론한 도시들은 모두 민주당 지지 기반이 탄탄하고 흑인 민주당원이 시장으로 선출된 곳이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는 살인율이 높은 공화당 지지 성향 도시들, 즉 멤피스나 세인트루이스, 뉴올리언스 등은 언급하지 않았다. 워싱턴에서 최근 가장 폭력적이었던 사건인 2021년 1월6일 의회 폭동도 모르는 척했다”고 지적했다. 의회 폭동은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벌인 일이다.
뮤리얼 바우저 워싱턴 시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법령상 대통령이 워싱턴에 공공안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연방 정부 지시에 따를 것을 요청하면 시장은 그 요청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워싱턴이 범죄 소굴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워싱턴의 자치권이 침해됐다는 사실을 축소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난해 워싱턴 범죄율은 전년 대비 35% 감소해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브라이언 슈월브 워싱턴 법무장관은 성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워싱턴 장악 시도가 “전례 없고 불필요하며 불법적”인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시 공무원들이 “모든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으며 워싱턴 주민들의 권리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