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조선왕조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로 조선시대의 치열한 당파 싸움, 즉 당쟁을 든다. 그런데 지금의 여당과 야당을 보면 달리 생각해야 할 듯하다. 여당과 야당의 다툼이 조선시대 당쟁보다 덜하지 않다. 그런데, 권력을 두고 대립하는 정치집단 사이에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인들 갈등과 다툼이 없겠는가? 국익보다 당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아도 흔한 일이다. 모두의 이익보다는 내 이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 몰락 후 40년 안 되는 기간 동안 많은 정당이 등장했다. 여당과 야당 중심세력의 특성이 유지되면서도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를 전후로 민심의 향배에 따라 정당들이 출몰했다. 조선은 왕조국가였다. 그 때문에 국민이 아닌 국왕 마음을 얻는 사람 뒤에 사람들이 모였고 정치세력이 형성됐다.
널리 알려진 대로 선조 때 당파로는 서인과 동인이 처음 성립되었고, 점차 세력을 얻은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 서인, 북인, 남인의 영수는 각각 이이, 이산해, 류성룡이었다. 선조가 크게 신뢰하고 총애했던 인물들이다. 모두 훈구세력이 물러나고 새롭게 사림세력이 권력을 획득했던 시기, 즉 집권세력 교체기에 몇년 차이로 관직에 들어왔다. 모두 20대였고 사림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나이는 이이가 가장 많았고 세 살 차이로 이산해, 류성룡 순이었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빨리 문과 급제해 관직에 오르고, 가장 먼저 정승이 된 사람은 이산해이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유명했다. 그의 삼촌이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다. 11세에 지방에서 치러지는 1차 과거시험인 향시에서 장원을 했다. 문과에도 겨우 23세에 합격했다. 그는 글씨로도 유명했다. 문과 합격 다음해에 국왕의 명으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景福宮) 세 글자 현판을 썼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판서에 올랐고 가장 먼저 정승이 되고 영의정이 되었다.
조선시대 대표적 민간 교육기관인 서원은 훌륭한 인물을 배향하고 교육을 담당했다. 서원마다 기리는 인물이 한 명 이상 있었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1000개 가깝던 서원 중에서 이산해를 배향한 서원은 없었다. 이를 우연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에 대해 내린 평가이다. 선조 때 ‘팔문장(八文章)’ 중 한 사람이고 글씨로도 유명하던 이산해였지만 그의 문집은 당대 그의 명성과 위상에 비해 변변치 않다. 조선시대에 이미 평가절하되었고 오늘날 전해지는 자료도 변변치 않으니 그에 관한 연구도 매우 적다. 그를 다룬 박사논문이 한 편도 없어서 이이, 류성룡과 크게 대비된다. 이이는 문묘와 종묘에 배향되었다. 조선 후기에 남인은 정치적 주류가 아니었지만 류성룡과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내내 기려지고 존중받았다. 서울 길이름에 이이와 류성룡의 호를 딴 율곡로와 서애로가 있다.
<광해군일기>에 이산해의 졸기가 나온다. 졸기는 사관이 쓴 일종의 부고 기사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총명하여 일곱 살에 능히 글을 지어서 신동이라 불리었다. … 자라서는 깊은 마음에 술수가 많아서 밖으로는 비록 어리석고 둔한 듯하지만, 임기응변을 할 때는 변화무쌍함이 귀신같았다. … 그 마음의 술수는 대개 임금의 뜻을 받들고 영합하여 교묘히 아첨함으로써 먼저 그의 뜻을 얻은 뒤에, 몰래 역적이란 이름으로 남을 모함했다.”
물론 <광해군일기>가 북인이 아닌 서인이 편찬한 것이기에 이렇게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인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에 있는 남인의 영수 류성룡의 졸기는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에 인물을 평가하는 능력 기준에서 이산해는 우수했고, 현실 정치에서 유능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인물 평가는 엄격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당대 인물 평가보다 훨씬 엄격하고 반듯했다. 그 엄격함과 반듯함이 조선을 오래 지탱했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