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위즈덤하우스, 2025)이 출간되었다. 2020년부터 2021년까지 세 계절 동안 라디오에 연재했던 에세이 원고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제야’나 ‘마침내’ 같은 부사가 어울릴 듯하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쓰는 사람으로 지내면서 깨달은 사실은 각각의 책에는 그 책만의 삶이 있다는 것이다. 이삼십대에는 출간에 대한 조급함이 있었다. 그 시기에 책이 꼭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으로 이어져 불안정한 상태로 나를 내몰기도 했다. 시의성이라는 말로 나의 성급함을 두둔했지만, 돌이켜보니 책의 진가는 특정 시기에 예속된 것이 아니었다. 좋은 책은 언제고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자, 당장의 반응에 신경 쓰기보다 좋은 책을 쓰기 위한 고민이 깊어졌다.
책이 예상보다 일찍 나오게 되면 독자들을 빨리 만나서 좋고, 하염없이 출간이 늦어지면 원고를 다시 살필 시간을 벌어서 좋았다. 관점을 달리하니 모든 책은 ‘때마침’ 나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 책은 밤에 펼쳐지는 이야기로 가득하니 계절을 탈 염려도 없다. 밤은 매일 찾아오는 것이니까. 눈 밝은 편집자는 글마다 필사할 수 있는 페이지를 마련해두었다. 그는 밤이라는 시간은 따라 쓰기 좋은 시간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때도, 그것이 내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때도 밤이라고 했다.
본디 나는 필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떤 문장을 따라 쓰는 시간에 다른 문장을 하나 더 읽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더 많이 읽는 것이 더 넓어지는 길이라고 믿었다. 다독은 분명 견문을 넓혀줄 테지만, 읽은 책을 소화하지 않고 넘어가니 나중에 그 책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이 부옜다. 줄거리가 점차 희미해지다가 이내 등장인물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종내에는 그 책을 읽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졌다. 필사를 시작하고 깨달은 것은 잠시나마 그 문장을 내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 자 한 자 쓰는 시간은 한 문장 한 문장 읽는 시간보다 길었다. 그러나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선명해지는 게 있었다. 바로 나였다. 문장을 따라 쓰는 시간은 그것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내 고유한 리듬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책 속 주인공과 내가 지긋이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주인공의 선택 앞에서 함께 고민하고 문장에 스며든 그의 감정을 헤아리다 보면 나를 둘러싼 공기가 일순 팽팽해졌다. 낮이 바깥으로 넓어지는 시간이라면 밤은 확실히 안쪽으로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깊은 밤’은 있지만 ‘깊은 아침’은 없듯, 문장들을 따라 쓰면서 나는 밤이 부여한 깊이에 빠져들었다.
어릴 적 밤은 무서운 시간이었다. 귀신 이야기라도 들은 날이면 잠이 싹 달아났다. ‘귀신이 나타나면 어쩌지?’ 걱정하며 머릿속으로 숫자를 거꾸로 세곤 했다. 청소년기에 밤은 하루 중 가장 열띤 시간이었다. 과제하고 문제 풀고 단어를 외워도 밤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밤의 열기는 쉬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려 밤을 통과하고 나면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여러모로 취하기 좋은 시간이 다름 아닌 밤이었다.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사람에, 분위기에, 이야기에 한껏 취하곤 했다.
이제 내게 밤은 깃드는 시간이다. 오늘 밤이라는 시간에 깃드는 것은 물론, 어젯밤 읽다 만 책에 선선히 깃든다. 하루를 되돌아보며 비눗방울처럼 떠오르는 장면들에 깃들기도 한다. 대개의 비눗방울은 금세 터져버리지만, 개중 어떤 비눗방울은 나를 싣고 그때 그 장소로 데려간다. 해버린 말과 하지 못한 말을 쥐락펴락하다가 만회할 수 있는 내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책 속 문장을 따라 써보며 크고 작은 후회와 다짐을 하기도 한다. 취하지 않아도 밤은 충분히 깊어질 수 있다.
오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