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미국내 투자와 설명하고 있는 엔비디아 CEO 젠슨 황(오른쪽)과 이를 지켜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연합
엔비디아의 보급형 인공지능(AI) 칩 ‘H20’을 둘러싼 미·중 신경전에 국내 반도체 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의 H20 수출 재개 결정에 반사이익 기대감이 커졌지만 중국의 ‘사용 자제령’이 변수로 떠올랐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양국의 반도체 대립 속에서 업계는 향후 생산·판매 전략을 두고 고심하고 있다.
14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의 H20 대중 수출 재개로 업계가 수혜를 입을지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엔비디아는 AI 성능을 끌어올리는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80%에 이르는 반도체 설계기업이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즈는 지난 9일 트럼프 행정부가 엔비디아의 H20 수출 면허 발급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H20은 엔비디아가 중국 수출용으로 만든 보급형 AI칩이다. 조 바이든 정부 시절부터 고성능 AI칩의 중국 수출이 금지되자 이를 우회하려고 일부러 성능을 떨어뜨렸다.
이후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지난 4월 H20 수출마저도 가로막았으나 3개월 만에 수출 재개를 허가한 것이다. 다만 엔비디아는 H20 재수출 대가로 관련 매출의 15%를 트럼프 행정부에 지급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출 재개 소식에 국내에서는 기대감이 터져나왔다. H20에는 고대역폭 메모리반도체 HBM3E 8단이 탑재되는데, 주로 SK하이닉스가 공급하고 있다. 엔비디아가 H20 생산을 대폭 늘리면 SK하이닉스 생산량이 확대될 수 있다. 아직 품질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삼성전자에게도 기회가 열릴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자국 국영·민간 기업에 “H20 사용을 자제하라”는 통지문을 보낸 사실이 미국 경제 전문 매체 블룸버그 12일 보도로 알려지면서 기대감은 한풀 꺾였다. 중국이 특히 우려하는 것은 ‘보안’이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H20에 위치추적·원격종료 기능이 포함된 ‘백도어(비밀 접근 장치)’가 내장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엔비디아는 “사실 무근”이라는 입장이지만 트럼프 행정부와 미 의회가 그간 H20에 위치추적 기능을 내장하는 방안을 여러 차례 공식 언급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과 중국의 H20을 둘러싼 ‘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는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답답함을 호소한다.
업계 관계자는 “갈수록 불확실성이 커져 생산·판매 계획을 어떤 방향으로 짜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면서 “특히 삼성·SK하이닉스에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를 납품하는 중소 협력사의 고민이 가장 클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의 다른 관계자도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에 국내 반도체 업계가 엮인 형국”이라면서 “두 나라 신경전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일단 수출이 재개되긴 했으니 어느 정도 수혜는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국 반도체 다툼의 불확실성 탓에 전문가 전망도 온도차가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중국 정부가 통지문을 보낸 이상 H20 수출이 재개되더라도 (엔비디아) 매출이 그리 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서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반면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자제령일 뿐이기 때문에 어쨌든 H20 구매자는 나올 것”이라면서 “한국 업계에 나쁜 소식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