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이 세계경찰 역할을 그만둘 것이라는 전망은 성급한 예단이었다. 트럼프 정부는 태국·캄보디아에 분쟁을 멈추라고 경고했고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평화협정을 중재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휴전 협상도 손을 댔다 뗐다 변덕을 부리긴 했지만 개입의 끈을 놓지 않았다. 트럼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고 싶어 온갖 분쟁에 참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가자지구 문제에선 트럼프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목소리를 낸 순간이 없지는 않았다. 그는 지난달 말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가자의 굶주림이 심각하다. 지원을 더 많이 하겠다”고 했고 가자에 기아가 없다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스타머가 트럼프에게 뼈만 남은 가자 주민들의 사진을 보여준 게 주효했다. 그러나 얼마 후 트럼프가 앙상하게 마른 이스라엘 인질의 사진을 봤고 네타냐후의 가자 점령 계획을 내버려두기로 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트럼프가 사진 몇장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이 중동은 네타냐후 천하가 됐다.
최근 이스라엘은 국경의 개념을 상실한 것처럼 활개치고 있다. 지난 6월 이란을 폭격한 데 이어 지난달 시리아 수도를 공습했다. 그리고 이달 초 가자지구를 완전히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기어이 공식화했다. 이스라엘은 가자에 사는 팔레스타인인을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심산인 것으로 보이는데, 굶겨 죽이거나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이다. 모두 현재 진행 중인 일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3월 가자지구를 봉쇄해 구호식량 반입을 차단했다. 지난달 구호품 공중투하를 허용했지만 230만 주민의 굶주림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얼마 안 되는 식량을 남들보다 먼저 차지할 힘이 없는 여성과 어린이부터 희생양이 되고 있다. 이 비극의 목격자여야 할 기자들, 24시간 밀려드는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들도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있다. 기아로 250명 이상이 숨졌고 이 중 100명 이상이 어린아이다.
강제 이주 작업은 가자 주민을 받아줄 제3국을 물색하는 일과 가자 평탄화 등 투 트랙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난달 BBC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지난 3월 이후 가자 전역에서 건물 수천채를 철거했다. 주민들이 돌아갈 집을 남겨두지 않겠다는 게 목적이다.
전쟁 중 공습으로 민간인이 다치거나 숨지는 것은 전쟁의 일부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기아와 강제 이주는 전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가 아니다. 이스라엘 정부·군·의회 관계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절멸”을 주장하고 이스라엘의 임무가 “가자를 지구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출신의 집단학살(제노사이드) 연구자 오메르 바르토브 브라운대 교수는 이에 대해 “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인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공언한 것이며 현재 이스라엘의 행위는 이 의도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국가·민족·인종·종교 집단을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파괴하려는 의도로 하는 모든 행위’를 국제법은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한다. 지난달 말 이스라엘 내 유력 인권단체 2곳은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제노사이드를 자행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언론인 기드온 레비도 가자지구 상황에 대해 “이 공포를 온전한 이름으로 불러야 할 때가 왔다. 이것은 제노사이드이고 한 민족의 절멸”이라고 개탄했다. 역설적이게도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는 홀로코스트 연구 과정에서 탄생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이 또 다른 제노사이드의 가해자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주요 강대국들은 한가하다. 영국·프랑스·캐나다가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을 추진하긴 하지만 이는 이스라엘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유럽연합이 이스라엘에 가자지구 기아 해결을 촉구하고자 준비한 공동성명에는 독일 등 8개국이 서명하지 않았다.
외신은 먹지 못해 배가 부풀고 갈비뼈가 드러난 가자 어린이들의 사진을 연일 보도하고 있다. 제노사이드가 랜선과 와이파이를 타고 전 세계로 중계되는 시대다. 온 인류가 이 고통을 목도하면서도 방관한다면 역사는 우리를 반인륜적 범죄의 공범으로 기록할 것이다. 결국 열쇠는 트럼프가 쥐고 있다. 미국이 나서지 않는 한 이스라엘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트럼프가 가자지구를 외면한다면 그의 노벨 평화상 타령은 헛소리일 뿐이다.
최희진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