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1500억달러(약 209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지난해 국내 제조업 전체 설비투자 규모가 1060억달러이니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지난달 타결된 한·미 관세협상의 대미 투자액 3500억달러 펀드와는 별개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관세폭탄을 피하기 위한 기업들의 자구책이지만, 국내 제조업 위축과 일자리 감소가 ‘발등에 불’이 됐다.
한국경제인협회 등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올해부터 4년간 미국에 260억달러를 투자한다. 지난 3월 정의선 회장이 백악관에서 직접 발표한 투자 금액보다 50억달러 증가했다. LG·SK그룹 등도 배터리와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 미국 투자를 늘리기로 했다. 대한항공은 차세대 항공기 103대 구매 등 총 826억달러의 투자 계획을 내놨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에 370억달러짜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과 연구·개발(R&D) 시설을 짓고 있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제조업 비중이 2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4%)의 두 배에 이른다. 한국이 10대 경제대국에 오른 것도 수출 중심의 제조업 역할이 컸다. 그런데 미·중 경제전쟁이 격화하고, 동맹국들에까지 높은 관세와 대미 투자 확대를 요구하는 이른바 ‘트럼프 라운드’ 체제가 도래하면서 하루아침에 한국 제조업이 풍전등화 신세가 됐다. 그동안 무관세로 수출하던 기업에 15% 관세는 큰 부담이어서 미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문제는 그만큼 국내 생산이 줄고 고용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미 올 1분기 제조업 일자리는 1년 전보다 1만2000개 줄어 4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런 변화에 정부와 기업,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과거 외환위기 때처럼 경제가 후퇴하고 민생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대미 투자 여력이 있는 대기업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최근 구조조정에 돌입한 석유화학 업종 사례에서 보듯 국내 제조업체 10곳 중 8곳은 자사의 주력 제품이 시장에서 출혈경쟁을 벌이는 ‘레드오션’ 상태라고 한다.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이 마무리됐다. 전체적으로 선방한 회담이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최악을 면했을 뿐 문제는 지금부터다.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기업과 노동자들이 살길을 찾아야 한다. 정부는 고급 인재 양성을 위해 기업들이 연구·개발 센터는 국내에 두도록 유도하는 식의 미시적 정책부터, 경제구조를 바꾸고 인공지능(AI) 산업을 육성하는 거시적 정책까지 총망라하는 종합대책을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