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무언가에 영혼을 판 건 아닌가 하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 무언가가 대개는 돈과 권력일 텐데, 하물며 반성의 기미조차 없으니 답답함이 찜통더위 저리 가라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돈과 권력이었을까. 아니면 돈과 권력보다 더 큰 무언가를 얻고자 했을까. 실제로 그들이 영혼을 팔았는지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오래전부터 영혼을 판 사람들의 끝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1890년 발표한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1910년 무성영화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영화로 제작되었고, 국내에서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진 걸작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스무 살이 넘었지만 “소년의 모습”을 한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화가 바질 홀워드는 홀린 듯 그의 초상화를 그렸고 “세상 사람들의 경박한 눈길에 내 영혼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며 전시조차 거부하고 있었다. 문제는 도리언 그레이였다. 나르키소스가 샘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반했듯, 자신의 초상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끝내 하지 말아야 할 약속을 하고 말았다. 초상화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만 있다면, 영혼도 팔 수 있다고 그는 약속했다.
영혼은 아니지만, 영혼의 무게와 진배없는 그림자를 판 사람도 있었다. 프랑스 출신 작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가 1814년 출간한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주인공 페터 슐레밀은 가난한 청년이었다. 슐레밀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민 것은 “회색 옷 입은 남자”였다. 그는 슐레밀에게 “행운의 자루”를 내밀며 “당신의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자”를 팔라고 청했다. 행운의 자루는 이름처럼 슐레밀에게 행운, 즉 부와 명예를 안겨주었다. 성정이 맑았던 슐레밀은 혼자서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매번 주머니를 열었고, 사람들은 도움에 감사했다. 그런 슐레밀의 평판이 좋아진 것이야 당연지사.
영혼을 판 도리언 그레이는 어떻게 됐을까. 애초의 바람처럼 그의 아름다움은 변치 않았다. 하지만 그토록 밝게 빛났던 초상화의 모습은 사악한 모습으로 점점 변해갔다. 현실에서 자기 탐닉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초상화의 도리언 그레이는 타락하고 사악한 모습이 됐다. 영혼을 판 것은 그 자신인데, 그가 겨눈 칼은 초상화를 그린 바질 홀워드에게 향했다. 홀워드를 죽인 도리언 그레이는 초상화마저 찔렀다. 그렇게 하면 아름다웠던 자신의 모습이 회복될 줄 알았다. 짐작대로겠지만, 도리언 그레이의 마지막이 궁금하다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그림자를 판 슐레밀은 어떻게 됐을까. 슐레밀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의 첫 반응은 ‘불쌍하다’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림자 없는 슐레밀을 다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다들 못 볼 걸 본 것처럼 밀어냈다. 회색 옷 입은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림자를 돌려줄 테니 영혼을 달라고 그는 말했다. 슐레밀의 선택이 궁금하다면 <그림자를 판 사나이> 역시 읽어볼 일이다.
고흐는 진짜 자기 모습을 그리려고 귀를 잘랐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의 주인공 송화는 소리를 얻기 위해 눈을 내놓았다. 두 사람의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릇 영혼을 팔 심산이라면 삶을 향한 애정과 숭고한 가치를 세상에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도 무언가에 영혼을 판 사람은 아닌가, 서글픈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속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동석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