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들 ⓒ이훤
어떤 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홀린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내가 여러 채의 세계로 뒤엉킨 불씨라는 걸 기억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깊숙이 들어와, 헤집고 지피고 비추는 존재들이. 그들을 도깨비라고 불러보자.
도깨비들은 어딘가 툭 튀어나와 있다.
분명히 하나의 불빛이었는데 어느새 다른 색을 띠고 있다. 또렷하고 동시에 취약하다.
도깨비 중 하나가 말한다.
“나는 내가 내 이름대로 살지 않은 시간이 길어 수고스러웠어.”
살기 위해 여러 이름을 발명해온 이들은 생각한다. 어쩌면 나도 도깨비겠구나. 목소리는 불씨와 닮아 퍼지는 성질을 가졌다. 불 앞에서 주위에 있던 자들은 자기 몸을 다시 확인한다.
도깨비는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 시 쓰는 도깨비, 노래하는 도깨비, 노동하는 도깨비, 소녀가 된 도깨비, 겁먹고 도망친 도깨비, 돌아온 도깨비…
다르게 생겼지만 그들은 전부 자신을 의심해본 경험이 있다. 미미해져본 적 있다. 눈에 덜 띄거나 지워져본 적 있고 그럼에도 열망을 쫓아온 자들이 도깨비가 된다. 어떤 인간은 도깨비인 척하다가 진짜 도깨비가 돼버린다.
한자리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날 그들 중 하나가 묻는다. “여기가 아니라면 우리가 도깨비일까?” 무엇이 나를 나로 만드는지, 어떤 시공간까지가 우리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구하는 이들은 인간과 도깨비를 오간다.
이 저녁 마음이 분주한 건, 이래은이 연출하고 경지은 김의태 손혜정 양대은 윤희민 이다은 배우가 참여한 연극 <초록빛 목소리>를 보고 왔기 때문이다.
이 극에서 배우들은 모든 지문을 소리 내어 읽으며 연기한다. 보통 지문은 대본에만 표기되어 관객은 들을 수 없다. <초록빛 목소리>에선 지문이 배우 입으로 배우를 따라다닌다. 튕겨 나오는 말처럼. 도깨비불처럼. 행동과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 동시에 들린다. 그러다 무대에 없는 대상을 불러오고 시간을 되돌리는 주문으로 쓰인다. 이상하지. 있었다고 말하면, 거기 존재했던 사람이 된다. 머무른 시간이 생긴다.
보는 동시에 듣고, 듣는 동시에 보는 경험은 미래를 선언하며 움켜쥐는 장면 같다. 작은 불씨처럼 타올랐다 꺼진다. 아주 얇은 유격을 가진 한 쌍의 현재 같다. 덕분에 내 안에 도깨비들이 깨어난다. 움켜쥔 대사를 읊조리며 동굴을 빠져나온다. “뭔가를 미친 듯이 그리워하고 싶어. 이 마음은 뭐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
이런 날은 온몸이 심장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