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외벽에 최승자 시인의 시 ‘20년 후에, 지에게’에서 발췌한 광화문 글판 가을 편이 걸려있다. 2025.9.1. 정지윤 선임기자
서울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를 지나 경복궁을 바라보고 광장을 걷다 보면 오른편에 교보생명 빌딩이 보인다. 교보생명 본사 사옥은 오랜 시간 같은 자리를 지켜온 광화문 일대의 랜드마크 빌딩이다. 건물 외벽에는 1991년부터 30년 넘게 광화문 글판이 걸리고 있다. 시원시원한 크기의 글판이라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철마다 새 옷을 갈아입는 글판에는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간결한 문구가 주로 등장한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첫날에 광화문 글판 가을편이 내걸렸다.
1일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외벽에 최승자 시인의 시 ‘20년 후에, 지에게’에서 발췌한 광화문 글판 가을 편이 걸려있다. 2025.9.1. 정지윤 선임기자
1일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외벽에 최승자 시인의 시 ‘20년 후에, 지에게’에서 발췌한 광화문 글판 가을 편이 걸려있다. 2025.9.1. 정지윤 선임기자
2025년 광화문 글판 가을편. 대학생 디자인 공모전 대상 수상자인 조혜준씨는 곡선 그래프를 모티브 삼아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의 모습을 그렸다. 균형과 불안 사이를 아슬아슬 오가며 꿋꿋이 견뎌내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최승자 시인의 시 ‘20년 후에, 지(芝)에게’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원문은 제법 길다. 이번 문안은 삶이 고단하고 지치더라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다 보면 아름다운 결실을 보게 된다는 의미다.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 응원하며 살아가자는 응원의 메시지도 담겼다. 시인은 인생의 선배로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이에게 20년 후의 삶에 대한 지혜를 전하는 듯하다.
최승자 시인이 2005년 경 서울의 문학과지성사 사옥 앞마당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최승자 시인은 1979년 시집 ‘이 시대의 사랑’으로 등단했다. 아래는 ‘20년 후에, 지(芝)에게’의 원문이다.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 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 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 오잖니
횐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 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 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 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