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 관계의 정점은 10년 전 이맘때였다. 2015년 9월3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70주년 열병식 행사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톈안먼 망루에 섰다. 당시 중국인들은 박 전 대통령을 ‘퍄오다제’(朴大姐·박근혜 큰누님)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열렬히 환영했다. 올해 80주년 전승절 열병식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 주석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한·중관계는 2016년 한국 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중국이 반발하면서 급전직하했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냉각기에 접어들었다. 어긋난 한·중관계는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좀처럼 복원되지 못했고 윤석열 정부가 가치외교를 들고나오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최대 시험대였던 한·미 정상회담의 고비를 넘긴 이재명 정부는 이제 중국을 상대해야 한다. 오는 10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
대중 외교 리셋에 돌입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의 전통적 외교 기조인 ‘안미경중’(안보는 미국·경제는 중국)이 어려워졌고, 한국 외교가 미·중 사이에서 움직일 공간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뒤 경제적으로 급부상하면서 미·중이 체제 대결을 벌인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에 민간주도 시장경제가 결합된 미국 모델과 권위주의 체제하의 경제발전과 내정불간섭을 내건 중국 모델이 각각 ‘워싱턴 컨센서스’와 ‘베이징 컨센서스’란 이름으로 경쟁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이전투구식 싸움은 아니었다. 지금은 미국에서 시장경제의 가치와 자유무역 기조가 갈수록 시들해지고 중국은 반미 연대에 혈안이 돼 있다.
대중 외교를 리셋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중국 경제의 질적 변화 때문이다. 중국은 10년 전부터 기술 혁신을 통한 제조업 육성에 자국의 미래가 있다고 보고 ‘중국 제조 2025’ 전략을 추진했다. 그 결과 정보기술, 전기차, 로봇, 우주항공, 드론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술을 다양한 산업과 융합해 경제 전반에 걸친 혁신을 촉진하는 ‘인공지능 플러스’ 정책을 펴고 있다. 설익은 기술이라도 일단 현장에 적용하고 개선점을 찾는 ‘차이나 스피드’의 위력은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그간 한·중관계에서 경제협력이 가능했던 것은 상호보완성이 비교적 명확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술과 장비가 중국의 저임금 노동력, 토지와 결부되면서 상호 이익이 가능했다. 하지만 양국의 산업구조는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경쟁적 관계로 접어들었다. 2023년 한국의 대중국 무역흑자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한국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 기간 25% 수준을 유지하다 2022년 22.8%, 2023년 19.7%, 2024년 19.5%로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향후 대중 협력모델은 ‘선경후정’(선경제·후정치)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중국을 기술 선진국으로 인식해 신산업과 신기술 분야에서 기술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관리하는 것도 과제다. 과거 중국의 보복에 한국 경제가 타격을 입을 때마다 중국에 너무 깊숙이 발을 담갔다는 한탄이 쏟아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수출의 적정 중국 의존도는 19.4%로 분석됐다. 사실상 지난해 수준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인데 소비재의 중국 내수시장 공략 등 수출구조 다변화가 필요하다.
중국이 한·미 동맹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과도한 미국 쏠림을 경계해야 한다. 한·중관계의 안정적 관리는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립이 격화되지 않도록 완충작용을 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 용인으로 방향을 잡을 경우를 대비해 한반도 비핵화 입장을 갖고 있는 중국과 공조를 탐색해야 한다.
중국 고위 인사들은 한국을 두고 ‘이사 갈 수 없는 이웃’이라고 표현하지만 한국을 과거 중화체제의 속국 정도로 여긴다면 질적 관계 개선은 요원하다. 청나라를 둘러보고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은 중국을 깔보는 태도를 ‘망령’이라 부르며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차분히 대화를 이끌어 속내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중국 경시 태도를 경계한 그의 조언은 아직도 유효하다.
오관철 사회경제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