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장영남. 잼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장영남(52)은 오래 끓인 속을 짐작하게 하는 연기를 한다. tvN 드라마 <미지의 서울>의 쌍둥이 미지·미래의 엄마 옥희는 다정한 말 하나 않는 억척스러운 엄마지만, 장영남은 딸들에 대한 옥희의 은은한 걱정과 애정을 눈빛만으로 전했다. 감정에 동화되게 하는 힘도 대단하다. 2001년 홍제동 화재 참사 사건을 다룬 영화 <소방관>(2024)에 몰입을 더 했던 건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의 아내로 분해 기다리는 가족의 초조함을 전달한 그의 연기였다.
오는 10일 개봉하는 영화 <비밀일 수밖에>(김대환 감독)는 장영남이 그려낸 인물을 더 긴 호흡으로 볼 수 있는 기회다. 매체 연기로는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로 조연 역할이 많았던 그가 이번에는 ‘서사의 주연’인 엄마, 정하를 연기한다.
캐나다에 유학 간 아들 진우(류경수)가 불현듯 여자친구 제니(스테파니 리)와 함께 정하의 강원도 춘천 집을 찾아온다. 고등학교 교사인 정하는 모종의 이유로 학교에 휴직계를 낸 참이다. 동성 연인 지선(옥지영)과 동거 중이기도 하다. 아들에겐 굳이 말한 적 없는 사실들이다.
이미 속이 복잡한데, 한국을 찾은 제니의 부모에게까지 방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제니 아빠(박지일)는 무례한 언사를 일삼고, 제니 엄마(박지아)는 고상한 말투를 흉내 내지만 뻔뻔한 구석이 있다. 사돈지간이 될 수도 있는 범-가족 모임은 정하에겐 달갑잖고 관객에게는 웃긴 촌극처럼 흘러간다.
영화 <비밀일 수밖에>속 세 커플이 놀이공원에서 어색하게 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제니의 부모 문철(박지일)과 하영(박지아), 정하(장영남)과 지선(옥지영), 정하의 아들 진우(류경수)와 여자친구 제니(스테파니 리). 슈아픽처스 제공
장영남은 ‘특별한 동반자가 있는 엄마’라는 설정이 놀랍고 흥미로웠다고 한다. 8일 서울 마포구 한 공간에서 만난 장영남은 “‘우리 엄마가 어느 날 문득 그런 비밀을 털어 놓는다면?’ 생각해 보니 어렵기도 궁금하기도 하더라”며 “그동안 엄마 역할을 많이 했지만, 이 엄마는 새로운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궁금했다”고 출연 이유를 밝혔다.
캐릭터를 준비하며 지선 역을 맡은 배우 옥지영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고 한다. 대본에 쓰이지 않은 두 연인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빈칸을 채워나갔다. 촬영하면서는 지선을 “‘여자’라기보다 친구이자 애인, 남이지만 가족 이상으로 많은 걸 소통하는 사람”으로서 바라보며 사랑을 연기했다.
영화 <비밀일 수밖에>의 주인공 정하(장영남)과 연인 지선(옥지영)이 집에 여자친구를 데려온 정하의 아들 진우(류경수) 몰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슈아픽처스 제공
직접적인 애정씬은 없지만, 영화 초반 제니가 선물한 속옷을 보여주며 지선과 단둘이 방에서 알콩달콩 하는 장면이 있다. 장영남의 제안으로 추가된 장면이라고 한다. 그는 “지선 앞에서 정하가 애교를 부리는 등 무장해제된 장면이 있었으면 했다”고 했다. 아들의 앞에선 잔소리를 안 하려고 기를 쓰다가 쓴소리를 뱉는 엄마의 모습, 예비 사돈의 추태 앞에선 애써 미소짓는 사회인의 얼굴을 하는 정하는 지선과의 이 장면에서 유일하게 편안해 보인다.
정하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비밀일 수밖에>에서 코믹한 소동은 다른 인물들의 몫이다. 장영남은 관찰자적 주인공 역할이 어렵기도 했다고 말했다. “조연은 짧지만 굵게, 있는 그대로 감정을 다 표현하잖아요. 이건 펼쳐놓을 수 없으니 ‘(내 연기가) 밋밋하지 않나, 뭘 더 할 수 있을까’ 의구심도 많이 들었습니다.”
장영남은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해 1995년 극단 목화에서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데뷔했다.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2004)를 계기로 매체 연기로 발을 넓혔다. 연기를 시작한 지 햇수로 30년이지만, 그는 연기할 때 늘 고민이 많다고 했다. “저는 제가 트렌디하기보다는 극적인 연기 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누군가 제 연기를 보고 ‘현실감이 있다’ 말씀해주시면 힘이 나요. 현실적인 연기에도 접근이 되어 간다, 희망찬 거죠.”
영화 <비밀일 수밖에> 한 장면. 슈아픽처스 제공
장영남은 지난 10년을 “슬럼프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어릴 때의 성장통도 있지만, 나이 들어서의 성장통도 있는 것 같다”며 자기계발의 필요성을 매 순간 느낀다고 했다.
“적은 나이가 아니니 몸에 밴 것들이 있잖아요. 무언가를 채우기보다는 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고집이 생기고 자꾸 했던 걸 끌어와서 쓰려고 하거든요. ‘계속 버려야 한다’는 게 연기를 할 때 제 모토인 것 같습니다.”
‘버림’의 일환으로 몸에 익은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의학 소재 작품이나 좀비물에 도전해보고 싶은 것도 “지금까지 안 해봐서”다.
최근에는 따뜻한 대본에 끌리곤 한다. 그는 “요즘 사건·사고를 보면 가슴 쓸어내리게 되는 일도 워낙 많지 않나”라며 “그래서인지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것 같다”고 했다.
<비밀일 수밖에>는 그런 따스함이 있는 영화라고 했다. 장영남은 “각자 비밀이 있는 가족이 나오는데, 이를 무겁게 끌어내는 게 아니라 유쾌하고 때로는 엉뚱한 소동극처럼 풀어낸다. 편안하지만 또 불편한 사람들끼리의 동거가 어떻게 펼쳐질지 함께 웃으며 즐겨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