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에서 | 박솔뫼 지음 민음사 | 260쪽 | 1만7000원
“떠다니고 울리고 쏟아지는 소리들. 물 흐르는 소리 발이 돌을 밟는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지나는 소리 매미 매미가 울고 그런데 원준이도 정목이도 말수가 적었다.”
초여름 어느 날, 중학교 친구인 원준이와 정목이는 정목이 아버지 트럭을 타고 계곡에 놀러 간다. 계곡은 투명하고 찬란한 여름빛으로 가득하다. 두 소년은 널찍한 바위에 누워 차가운 물소리를 들으며 구름과 햇빛에 둘러싸여 놀다 맨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급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는 유년의 하루,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둘의 뒤를 따른다.
<영릉에서>는 기억과 감각, 움직임을 따라가는 여덟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여주에 위치한 영릉, 도쿄 게이오 플라자 호텔, 건어물이 유명한 서울 중부시장, 명동성당, 아오모리 등 다양한 장소를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의 경험과 기억이 펼쳐진다.
표제작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는 두 소년이 계곡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경험한 하루를 따라간다. 독특하면서 리듬감 넘치는 문장들은 시간과 공간, 인물 간 거리와 시선을 복합적으로 중첩하며 기억의 장면을 홀로그램처럼 재현한다. 이야기 후반부, 화자가 20년 후 원준으로부터 당시의 기억을 ‘듣는 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묘한 반전을 만든다.
작가는 끊임없이 ‘움직임’에 주목한다. ‘극동의 여자 친구들’이나 ‘스칸디나비아 클럽에서’ 속 인물들은 스스로의 몸짓과 이동을 연구하며 그 움직임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본다. 발걸음, 시선, 공간을 오가는 동선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과 관계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특정 장소를 배경으로 구체적인 경험들이 펼쳐지지만, 이야기는 치밀하기보다 감각적이다. 때로는 뚜렷한 결말조차 드러나지 않지만 그 빈틈이 오래 머무는 질문을 낳는다. 정목이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소년들을 뒤따르던 기운은 무엇이었을까. 기억의 잔상 속에 아른거리는 물음이 이야기의 끝을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