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유럽 정상들 간의 회담에는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 유럽 정상들은 젤렌스키를 엄호하고자 기존 일정을 취소하고 기꺼이 워싱턴에 동행했다. 미국의 태도도 우호적이었다. 트럼프는 휴전을 위해 젤렌스키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회담을 추진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백악관에 쏟아진 스포트라이트가 무색하게도 그날 이후 달라진 것은 없다. 러·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은 미·러 간에 사전 합의된 게 아니라 트럼프의 일방적인 요청에 불과했고 푸틴은 이를 수용할 의사가 없었다.
체면을 구긴 트럼프는 러시아를 제재하겠다고 큰소리치더니 갑자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국들이 먼저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중단해야 미국도 대러 제재를 할 수 있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이쯤 되면 푸틴을 제재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도 트럼프는 할 말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영미권 언론은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속담을 거론하면서 트럼프가 “짖기만 할 뿐 물지 않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에 대해 좌절감을 토로했다.
트럼프가 쩔쩔매는 사이 푸틴은 대범해지고 있다. 휴전은커녕 전쟁을 새로운 경지로 끌고 가고 있다. 지난 9일 러시아 무인기가 나토 가입국 폴란드 영공을 침범해 폴란드군에 요격당했고 19일에는 러시아 전투기 3대가 역시 나토 가입국인 에스토니아 영공에서 12분간 비행했다. 러시아가 나토를 상대로 회색지대 전술을 쓰면서 자신들이 나아갈 수 있는 한계선과 나토의 대응 수위를 시험해보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황이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시절 미국은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나토 영토의 모든 곳을 1인치도 빼놓지 않고 방어하겠다고 공언했다. 그간 러시아는 이 공약의 진위를 섣불리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푸틴에게 알아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실제로 푸틴은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폴란드 영공 침범 당시 트럼프는 SNS에 “러시아가 드론으로 폴란드 영공을 침범하다니?”라고 썼을 뿐 나토를 방어하겠다는 빈말 비슷한 것도 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말 한마디로 미국은 유럽 방위에 열의가 없으며 유럽은 홀로서기해야 한다는 현실이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유럽의 상황도 우크라이나보다 크게 나을 게 없다. 일단 러·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본격화된 드론전에 대응할 준비가 안 돼 있다. 유럽은 러시아의 폴란드 영공 침범 때 전투기, 조기경보통제기 등 상당한 자산을 투입했지만 저렴한 드론 떼를 상대하기엔 지나치게 비싼 것들이었다. 한 군사 전문가는 외신에 “총 10만유로 상당의 드론을 격추하려고 하룻밤에만 미사일 수백만유로어치를 썼다. 이게 지속 가능하다고 보느냐”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유럽 내부에서 나오는 이유다.
유럽 정치 지도자들이 국방비 증액, 군비 증강 등 재무장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증세를 하거나 다른 분야의 예산을 줄여 국방 예산을 늘려야 할 텐데, ‘총(국방)이 먼저냐 버터(생계)가 먼저냐’는 논쟁에서 총을 선택할 유권자가 다수가 아니다. 극우 정당 지지율이 우상향하는 와중에 집권 세력이 이런 여론을 모른 척하기는 쉽지 않다. 영국 총리실이 프랑스와 첨단무기 개발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 뒤 국민들에게 ‘이렇게 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구구절절 설명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유럽은 할 일을 하고 있다. 유럽 26개국은 러·우크라이나가 휴전하면 우크라이나 안보를 위해 병력을 파병하는 것에 동의했다.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을 차단하기 위한 19차 제재 패키지도 준비했다. 공은 다시 미국으로 넘어갔다. 트럼프는 레드카펫 위에서 푸틴과 기념사진을 남기는 데 열중할 것이 아니라 대러 외교와 제재를 병행해 휴전 협정을 성사시킬 생각을 해야 한다. 르몽드는 최근 사설에서 트럼프가 나토 편에 서서 이 과정을 완수하도록 유럽이 트럼프를 상대로 시시포스적인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유럽이 끝내 바위를 산 정상 위로 밀어 올려 트럼프 설득에 성공하고 휴전과 관련해 유의미한 진전을 만들어낸다면 트럼프로선 유럽에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할 일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취임 후 24시간 안에 끝내겠다”고 허풍만 떨다 사라진 대통령보다는 세계평화에 기여한 대통령이 되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말이다.
최희진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