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의 한 장면. CJ ENM 제공
골든레트리버 두 마리가 뛰어놀 만큼 넓은 마당, 야외 테이블과 온실까지 갖춘 교외의 전원주택에서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한 가족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아내와 두 아이에게 장어를 구워주고 있는 이 집 가장 만수는 나쁜 사람 같진 않다. 고등학교 졸업 후 25년간 제지회사에 일하며 내 집 마련에 성공했고 예쁘고 속 깊은 아내, 아들과 딸 등과 더 바랄 것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 가장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완벽한 중산층의 삶. 만수는 가족들을 끌어안고 말한다. “다 이뤘다”고. 행복의 정점에 선 만수는 상상도 못 했다. 명절도 아닌데 회사에서 선물로 보낸 장어가 실은 해고의 의미일 줄은. 어렵게 장만한 집도, 아내의 댄스수업과 테니스 칠 시간도, 아이들의 학원과 넷플릭스 구독까지 다 잃을 위기에 처할 줄은 말이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한 장면. CJ ENM 제공
24일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화제작 <어쩔수가없다>는 하루 아침에 실직한 중산층 가장 만수의 재취업기를 그린 작품이다. 만수는 3개월 안에 재취업을 다짐하지만 아르바이트와 면접을 오가는 지리멸렬한 시간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제지업계 구조조정 한파가 몰아닥치며 위기감이 극에 달하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상황을 돌파하기로 한다. 재취업의 걸림돌인 구직 경쟁자들, 그중에서도 ‘나보다 약간 더 나은’ 이들을 추려내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어쩔수가없다>를 연출한 박찬욱 감독. CJ ENM 제공
<헤어질 결심> 이후 3년 만에 돌아온 박 감독은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1997년 발표한 소설 <액스>(The Axe, 도끼)를 20여 년간 마음에 품고 있다 영화로 만들었다. 지난 23일 인터뷰로 만난 그는 “이것은 빵을 얻기 위한 전쟁이 아닌, 중산층 생활 수준에서의 전락을 피해야겠다는, 소위 말하면 아주 속물적인 이야기”라며 “불쌍하다기보다 안타깝고 어리석은 사람의 ‘거대한 헛수고’”라고 했다.
<어쩔수가없다>는 그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탈락하고야 마는 무한 경쟁 사회의 차가운 현실, 기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소외되는 노동자의 비애, 절박함 속에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괴로워하고 미안해하는 주인공 만수의 어리석음은 관객들로 하여금 짠한 마음이 들게 한다.
“유머를 작품 전반에 깨알같이 박아놨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그의 작품 중 코미디적 요소가 가장 진하게 드러난다. 만수의 어설픈 실행력과 인간미, 우연과 악연이 뒤엉킨 영화속 인물들간의 관계가 때론 정신을 쏙 빼놓는 몸개그로, 때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대사로 이어지며 웃음을 자아낸다.
경쟁자들에게 총을 겨눌 때마다 만수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연신 두드리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되뇌인다. “어쩔수가없다, 어쩔수가없다”. 관객들은 대담해지는 그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게 된다. 박 감독은 “관객들이 이병헌이라는 배우에 이끌려 만수를 응원하고 동정하면서도 그가 더는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길 바라는 것, 그 거리감을 왔다갔다했으면 했다”고 밝혔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한 장면. CJ ENM 제공
박찬욱 특유의 연출과 미장센은 여전하다. 교차하는 유머와 비극, 아름답고 스타일리시한 미술 디테일, 1980년대 가요와 제지 공장의 기계음이 어우러지는 기묘함은 주인공의 불안을 증폭시키면서 박찬욱의 세계관으로 관객들을 순간 이동시킨다.
<어쩔수가없다>는 제82회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됐고,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는 국제관객상을 수상했다. 박 감독은 ‘박찬욱 영화’에 대한 관객의 높은 기대가 부담되진 않는다면서도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은 떨쳐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잔혹함, 성적인 묘사나 뒤틀린 이야기 등 변태적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거 같다”며 “늘 관객 반응을 두려워하면서 전작과 영화와 어떻게 다르게 만들까 고민하는 감독일 뿐입니다”라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