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음악회에 다녀왔다. 60여명의 연주자가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아름다운 하모니를 선보였다. 대단한 애호가는 아닌지라 누구의 어떤 곡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때론 눈을 감고, 가끔 관심 있는 악기 연주자들을 응시하며 연주를 감상했다. 클래식 음악과 악기에 문외한이라 그랬겠지만,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하나의 소리를 내려면, 적어도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의 동작은 똑같지는 않아도 엇비슷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같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도 어떤 연주자는 미동조차 없었고, 바로 옆 연주자는 선율을 따라 앞뒤로 양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좀 더 집중해서 보니 연주자마다 현을 운지하는 손 모양도 달랐고 활의 움직임도 제각각이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서로 다름 속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2022년 방영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저마다 ‘다른’ 푸릉마을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온갖 상처를 제 탓으로 여기고 산 옥동, 옥동을 살갑게 보듬는 춘희, 순대가게 사장 인권, 얼음가게 사장 호식, 생선가게 사장 은희 등등은 나고 자란 푸릉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만물상 트럭 사장 동석, 이혼하고 귀향한 선아, 명문대에 입학했지만 이제는 자식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는 기러기 아빠 한수 등은 훌훌 떠나지 못해 고향 언저리를 맴돈다. 20회 내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자기만의 상처가 버거워 각기 다른 삶을 산다. 서로 다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예삿일. 잘 아시다시피 드라마는 해피엔딩인데, 주인공들은 서로서로 상처를 (먼저) 듣고, (그다음) 이해하고, (시간이 지나) 자신의 상처로 끌어안고서야 한마을 한 식구로 자리 잡는다. 다름을 인정하는 일은, 그들의 상처까지 인정하는 일임을 드라마는 매회 눈물샘을 자극하며 보여줬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지만 세상사에서 자주 ‘틀림’으로 이해됐다. “그건 우리와 달라”라고 이야기해야 할 대목에서 “그건 우리와 틀려”라고 말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독일 소아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야콥 하인의 <소시지와 광기>는 ‘달라’와 ‘틀려’를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풍자로 가득한 소설이다.
가까운 미래, 독일은 채식주의 사회로 변했다. 고기 파는 정육점은 대부분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곳들은 미성년자들은 가지 못하는 유해시설로 분류됐다. 하지만 육식의 세계에서도 채식주의자가 존재하듯 채식의 세계에도 육식주의자는 있게 마련이었다. 고기를 좋아하는 주인공 ‘나’는 미개인 보듯 하는 주변 시선이 따가워 채식을 하나씩 배워가는 중이었다.
채식만으로 연명하던 그에게 ‘육수맛내기69’라는 묘한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접근한다. 그는 제약회사, 무기회사, 포르노회사와 함께 콩과 두부 산업체가 거대한 ‘채식 카르텔’을 형성해 세상을 어지럽힌다면서 육식 지하조직에 들어올 것을 권한다. 이후 ‘나’의 삶은 알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고야 만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그것은 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어야 하는데 세상은 모든 사람을 향해 자꾸만 틀렸다고 손가락질한다.
‘나’의 가까운 미래가 궁금하다면 <소시지와 광기>를 읽어보시길 권한다. 136쪽밖에 되지 않는다. 돈과 이념 등에 좌우되는 세상이라지만,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상식’이 통할 리 없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희망의 실마리도 찾기 어렵다. 다른 몸짓이라도 하모니를 위해 애쓰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처럼, 상처를 껴안고 살지라도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기로 한 푸릉마을 사람들처럼, 다름이 편하고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장동석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