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저고리를 모티브로 한 카키색 볼레로에 일자 블랙진을 매치한 뒤, 바지춤에 전통 매듭으로 만든 노리개를 달았다. 발끝에는 버선코를 닮은 메리제인 슈즈가 경쾌하다. 미대 휴학생 서유랑씨(23)는 전통과 현대를 자연스럽게 엮어내며 인터뷰 장소에 등장했다. 그는 SNS에서 ‘생활한복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한복 인플루언서(@rainbow_sprout)다.
생활 한복 인플루언서 서유랑씨는 초심자라면 흰 셔츠를 사듯 흰색 저고리부터 시작해 점차 색과 패턴을 확장해 나가길 권한다. 한복 업계도 더 많은 이들이 한복을 일상복으로 부담없이 즐기도록 소재와 디자인의 다양화를 꾀하고 있다. 사진|서유랑 제공
서씨는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늦둥이 셋째딸이다. “어릴 땐 ‘내 것’이 제일 소중한 욕심쟁이였어요. 그런데 그 성격이 오히려 저를 한복에 눈뜨게 했죠.” 가족과 해외 문화 탐방을 나갈 때마다 휘황찬란한 현지 문화유산에 눈이 가면서도 한편으론 ‘빈정’ 상했다. 아무리 멋지다 한들 내 것이 아니므로.
“누군가 자금성의 규모를 이야기하면 ‘우리 경복궁도 그만큼 컸는데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어 복원을 못했을 뿐이야’라고 읊조리곤 했어요. 내 것이 제일 소중하고 예쁘다고 생각하다보니 한복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5000원짜리 대여 한복을 입고 고궁을 거닐며 외국인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는 일은 하나의 놀이처럼 즐거웠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그의 옷장에서 패스트 패션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생활한복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현재 옷장의 60%는 한복이 차지하고 있다.
생활 한복 인플루언서 서유랑씨가 한복입는 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유진 기자
그가 해외여행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한복 코디 스케치’다. 여행 기간 동안 입을 옷을 미리 그려보고 챙긴다. “여행 중에 현지인들이 쓱 지나가면서 ‘I love your outfit!’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면 저는 ‘생큐!’ 하고 다니는 맛이 여행의 묘미가 됐어요.”
지난해 다녀온 미국 언어연수길에도 생활한복과 한복을 잔뜩 넣고 떠났다. 유학 생활 중 글로벌 이벤트가 열리면 한국 친구들을 불러모아 ‘유랑이네 공유 옷장’으로 한복 패션쇼를 열었다.
그는 외국인이 한복을 아름답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로 ‘깃’을 꼽았다. “한복의 매력은 ‘깃’이에요. 이것이 일상복과 가장 큰 디자인의 차이거든요. 한복의 곧은 깃은 사람을 깔끔하고 단정하게 만들어줘요. 미국에서 외출하면 하루에 한 번씩 ‘그 옷 어디서 샀니?’라는 질문을 꼭 받았어요. 그 어떤 옷과도 차별화되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우리 고유의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생활한복을 처음 구매하는 사람이라면 셔츠형 ‘흰색 저고리’를 한 벌 사보라 권한다. “어디에나 대입 가능한 기본템이고, 흰색 셔츠를 대체해 청바지, 치마, 멜빵바지 등에 매치하면 됩니다. 깃과 고름 덕분에 은은한 한복 무드가 살아나죠.”
한복에 대한 도전정신으로 화려한 패턴부터 시작하면 금세 질려버리기 쉽다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 흰색 저고리에 적응했다면 그다음은 블랙, 그다음은 컬러, 익숙해졌을 때 마지막으로 패턴(무늬)에 도전해본다. 그는 이렇게 단계적으로 확장해 가면 “당신도 어느새 한복 멋쟁이가 되어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생활한복을 입고 문지방을 넘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노리개·댕기·가방·신발 같은 잡화부터 착용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전한다.
초심자라면 화려한 색이나 패턴은 피하자. 무난한 기본템부터 생활 한복으로 하나씩 바꿔본다. 그래도 쉽지 않다면 노리개 키링을 가방에 다는 것부터! 사진|서유랑 제공
한복 초심자라면 이렇게…
‘다나픽코리아’ 김수경 대표는 Z세대에서 보는 한복 열풍을 빌어 우리옷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사진|이유진 기자
한복 브랜드 ‘다나픽코리아’ 김수경 대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 패션시장에서 한복이 차지하는 비율은 2%에 불과했다. 그런데 Z세대에게 ‘한복=힙한 옷’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히면서 업계의 성장 속도는 매우 빠르다”며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내다봤다. 물론 장벽은 있다. 어디서나 쉽게 사기 어렵고, 디자이너 브랜드 중심이라 비교적 가격대가 높다. 한복 소재는 세탁·관리도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따라붙는다.
김 대표는 ‘대여 서비스’를 이용해 한복을 먼저 경험해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시한다. 요즘은 웨딩한복뿐 아니라 일상 대여 플랫폼도 많이 생겼다. 단, 자칫 판매 제품 구매보다 더 비싸질 수 있으니 예산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진 작가의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는 플리마켓에 가면 요즘 한복 트렌드도 보고, ‘득템’도 할 수 있다. 그는 오는 10월10~12일 열리는 ‘경주 K공예 팝업스토어’와 10월24~26일 열리는 ‘감고당길 저잣거리 마켓’을 추천했다.
한복 하면 실크, 모시 정도로 알고 있던 소재 역시 다양해졌다. 세탁이 쉽고 구김이 적은 폴리 혼방 원단이나 리사이클 원단, 식물성 섬유 혼방 같은 에코 직물 원단 개발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김 대표는 “요즘 웬만한 생활한복은 세탁망에 넣고 세탁기로 빨아 자연 건조하면 바로 입을 수 있을 정도로 관리가 어렵지 않다. 단, 원단을 만졌을 때 피부에 닿는 감촉과 구김 회복력을 체크해 구매하라”고 조언했다. 참고로 서유랑씨의 한 달 평균 한복 구입비를 물었더니 10만원대라고 밝힌다. 그는 주로 와디즈, 텀블벅 같은 펀딩 플랫폼에서 마음에 드는 한복을 구매한다. 좋아하는 한복 브랜드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하면 이벤트나 세일 소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요즘 마케팅 잘된 신생 브랜드의 반소매 티 한 장에 6만~7만원은 하거든요. 그에 비하면 유행이나 나이 제한을 덜 타는 한복은 한 벌 하면 매우 오래 입을 수 있어 장기적으로 비싸다고 할 수 없어요. 게다가 중고 플랫폼에서 한복을 찾는 이들이 꾸준해 세컨드핸드도 원활해요.”
온라인 쇼핑몰에서 옷을 사려고 하면 사이즈나 핏에 대한 불안감은 어쩔 수 없다. 더구나 한복은 ‘체형을 많이 타는’ 옷이라고들 한다. 자고로 어깨가 좁고 가슴이 없어야 예쁘다는데 사실일까? 김 대표는 “한복에 적합한 체형이라는 것은 과거의 미적 기준일 뿐 요즘에는 다양하게 스타일링해 장점을 살릴 방법을 찾는다”고 말한다. △어깨가 넓은 경우 → 저고리의 깃은 넓은 것보다 좁은 것으로 △가슴이 있는 경우 → 고름(매듭)을 길게 늘어뜨려 시선을 분산 △키가 작은 경우 → 짧은 저고리와 허리선 높은 치마로 △키가 큰 경우 → 긴 저고리나 도포형 외투로 안정감 부여 등 체형보다는 비율과 선을 고려하는 것이 한복 스타일링의 핵심이다. 서씨 역시 “한복은 기본적으로 평면 패턴이라 타이트하지 않다. 오버핏 셔츠처럼 체형 커버가 잘되고, 대체로 무난하게 맞는다”고 덧붙인다.
■한복, 어울리는 체형 따로 있다?
한복 디자이너 브랜드 다나픽코리아 김수경 대표와 인플루언서 서유랑씨가 색동이 포인트로 들어간 저고리를 입어보고 있다. 사진|이유진기자
두 사람은 한복으로 한껏 꾸밀 수 있는 추석을 고대하고 있다. 서씨는 친척 어른들이 좋아할 전통한복으로 치마저고리를 입고, 김 대표는 활동하기 좋은 하얀 셔츠에 단청이나 일월오봉도 같은 화려한 무늬가 수놓인 허리치마를 믹스매치할 예정이다. 취향은 달라도 결론은 같다. 두 사람은 한복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유연해져야 더 많은 이가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즉각 떠올리는 한복의 모양새는 조선 후기의 짧은 저고리·치마에 국한되어 있다. 한복은 삼국시대, 고려, 조선 전기·후기, 구한말을 거치며 끊임없이 형태가 변해왔다. 서씨는 ‘고증’을 잣대로 삼아 “그건 한복이 아니다”라며 선 긋는 사람치고 정작 한복을 열심히 입는 사람은 드물다고 반박한다.
“한복은 늘 격식 있어야 하고 우아해야 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장벽일 수 있어요. 옷이 스트레스로 작용하면 결국 그 옷에는 손이 가지 않죠.” 김 대표가 덧붙이듯, 격식을 강요하는 순간 옷은 짐이 된다. 흰 셔츠형 저고리 한 벌로도 시작은 충분하다. 일상과 섞이고 각자의 취향과 섞일 때 한복은 비로소 우리의 옷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