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 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27일 온실가스 감축 등을 요구하며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종각역과 시청광장 등을 거쳐 돌아오는 행진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솔직히 말해도 되나요. 시끄럽고 힘들어요. 하지만 후회는 안해요. 정말로. 우리를 위해서 나온거니까.”
초등학교 6학년 최은서(13)에게 기후정의행진은 귀찮고 힘들지만 반드히 해야할 일이다. 그는 친구들과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힘을 내 지구를 지켜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던 한서후(13)는 “이렇게 가다가는 대한민국이 100년도 못 버틸 거예요. 어른들이 기후위기를 멈출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고 했다.
9월 늦더위의 열기가 남은 27일 오후 2시. 저마다의 간절함을 안은 시민들이 927 기후정의행진을 위해 서울 종로구 광화문 앞 동십자각 광장에 모였다. 2019년 이후 5번째 기후정의행진에는 653개 환경·노동·종교 단체와 1500명이 넘는 추진위원(추진이), 시민 등 3만여명이 모였다.
‘9.27 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27일 온실가스 감축 등을 요구하며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종각역과 시청광장 등을 거쳐 돌아오는 행진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이날 시민들은 올해 기후정의행진의 표어 ‘기후정의로 광장을 잇자’를 몸소 실천했다. 본 행진 시작 전부터 광장 곳곳에서 저마다의 기후정의를 호소했다.
청예(활동명·고등학교 2학년)는 지난 내란 국면에서 광장을 지킨 뒤 남태령을 시작으로 한달에 세번이상 다양한 투쟁 현장을 찾아다닌다. 말벌처럼 어디든 뛰어간다고 해서 ‘말벌 동지’로 불린다. 청예는 “요즘 청소년,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받는 감정은 허무”라며 “살기 힘든 세상인데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한다해도 결국 기후위기로 죽을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광장에 나온 이유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지는 않아요. 먼저 떠난 친구, 남은 친구에게도 도움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살아 있는 한 최대한 연대와 투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습니다.”
‘9.27 기후정의행진’ 참가자가 박스 안으로 음식을 넣어주고 있다. 반기웅 기자
절망 아닌 희망…서로를 응원하는 시민들
본집회가 다가오자 구호와 음악 소리가 광장을 채웠다. 시민들은 절망보다 희망을 나누려 애썼다. 시민에게 서명을 받는 활동가들에게 이 행사는 귀한 ‘대목’이다. 대학생 김보민씨는 탄소중립을 위해 ‘2035년 내연차 판매 중단’을 촉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김씨는 “보통 서명을 요청하면 거절하는 분들이 많은데, 오늘은 한 번도 거절하는 분이 없었다”며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여기 있구나’ 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서명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3시부터 시작한 본 집회에서는 농민, 노동자, 환경단체 활동가, 인권 활동가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참석자들이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는 기후재난위기를 심화시킨 ‘올해의 기후정의 걸림돌’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올해는 산업통상자원부, 원자력안전위원회, 국토교통부, 오세훈 서울시장, 글로벌 농기업인 몬산토 바이엘, 이스라엘 정부 등이 선정됐다.
조직위는 지난달 20일부터 31일까지 시민들에게 걸림돌 후보를 신고받아 이 중 13개 후보를 추렸다. 지난 15일부터 23일까지 투표를 통해 기후정의행진이 내건 6대 요구안별로 하나씩 걸림돌을 선정했다. 927 기후정의행진 요구안은 ▲기후정의에 입각한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와 전환 계획 수립 ▲탈핵, 탈화석연료, 공공재생에너지 확대로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실행 ▲반도체·AI 산업육성 재검토 및 생태계 파괴사업 중단 ▲모든 생명의 존엄과 기본권, 사회 공공성 보장 ▲농업·농민의 지속가능성 보장 ▲방위산업 육성과 무기 수출 중단 등 6가지다.
조직위는 “산업부는 NDC 강화를 적극적으로 방해했고, 원자력안전위원회는 노후 핵발전소 수명연장의 거수기 역할을 했으며, 국토교통부는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어 “오 시장은 공공성과 돌봄 서비스를 후퇴시켰고, 몬산토 바이엘은 유전자변형생물체(GMO) 확산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집단학살과 생태계 파괴, 대량 온실가스 배출을 야기했다”고 했다.
‘9.27 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27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 인근에서 ‘다이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황인철 공동집행위원장은 “기후재난이 야기하는 생존의 위협과 불평등 심화를 방치한다면 모든 생명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민주공화국 실현은 불가능하다”며 “기후정의의 모든 걸림돌을 치워버리고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자”고 제안했다.
한나 팔레스타인 긴급행동 활동가는 “이스라엘의 78년간 식민지배 후, 가자지구에서는 지금 거대한 집단학살이 이뤄지고 있다”며 “집단학살의 주범들이 기후파괴 주범들과 완전히 같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서방국가들은 그린워싱 기술이 기후정의를 구할 수 있다고 우리를 가르치려 든다. 식민지배를 경험한 한국이 지배국가들과 함께 착취에 동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9.27 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27일 온실가스 감축 등을 요구하며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종각역과 시청광장 등을 거쳐 돌아오는 행진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본 집회 이후에는 행진이 이어졌다. 행진은 광화문에서 출발해 종각역, 을지로입구역, 서울시청 광장을 거쳐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오는 경로로 진행됐다. 음악에 맞춰 행진하던 이들은 각 거점을 돌 때마다 농민과 에너지 공공성, 평화, 생태돌봄 등 주제에 맞춰 구호를 외치고 함성을 지르며 서로를 응원했다.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올해도 사이렌 소리에 맞춰 도로 위에 죽은 듯 드러눕는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벌였다.
2019년 첫 행진부터 빠짐없이 참여했다는 성가소비녀회 인천관구 소속 수녀님은 “기후위기는 곧 생명과 연결되는 위험”이라며 “종교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 대응해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