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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약

유씨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소송을 시작했다.

지난 23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 호스피스 병동에서 유씨를 만나 산재 소송에 뛰어든 이유를 물었다.

어린이방송 PD로 살아온 지난 시간을 말하는 내내 유씨의 야윈 얼굴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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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 ‘최후 변론’ 영상 찍은 어린이방송 PD의 마지막 소원

입력 2025.09.28 11:43

수정 2025.09.28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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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혜림 기자
  • 기사를 재생 중이에요

지난 8월8일 유고운씨(45)는 의사로부터 “더는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2022년 4월 난소암 3기 진단을 받고 3년여만이었다. 유씨는 세 아들과 남편에게 남길 말과 함께 ‘최후 변론’을 준비했다.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한 재판에 쓰일 진술이다.

유씨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소송을 시작했다. 지난 23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 호스피스 병동에서 유씨를 만나 산재 소송에 뛰어든 이유를 물었다. 어린이방송 PD로 살아온 지난 시간을 말하는 내내 유씨의 야윈 얼굴로 미소가 번졌다.

유고운씨가 지난 23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인터뷰 도중 웃고 있다. 우혜림 기자

유고운씨가 지난 23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인터뷰 도중 웃고 있다. 우혜림 기자

유씨는 언론광고학과를 졸업한 뒤 처음 방송 업계에 발을 들였다. 뚜렷한 목표도 알 만한 인맥도 없어 무작정 무대 감독(FD)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EBS 어린이 프로그램 <방귀대장 뿡뿡이>에서 소품을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화장지를 오려 사과 모양을 만들고 색종이를 접는 “대단하지 않은 일”이 유씨는 재밌었다. 밤새 100개가 넘는 소품을 만드느라 잠을 못 자도 마냥 좋았다. ‘이걸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겠지’ 생각하면 설렜다. “인생의 독이자 행복이었던” PD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2005년 유씨는 케이블방송사 대교어린이TV에 입사했다. 밥먹듯이 혼나도 일은 “날개 달린듯 점점 재밌어”졌다. 사람들과 함께 방송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제작진 소개 자막에 적힌 자신의 이름이 신기했다. 작은 방송사에서 16년간 일하는 동안 유씨는 직접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총 16억원의 정부지원금을 받았고 10개의 상을 받았다. 아이 셋을 낳는 동안 육아휴직 한 번 쓰지 못할 정도로 일이 많았지만 “PD는 그래야 한다고 배웠”기에 감당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 행운”이라고 유씨는 생각했다.

유고운씨가 2019년 4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선정하는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받은 뒤 사무실에서 웃고 있다. 유고운씨 제공

유고운씨가 2019년 4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선정하는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받은 뒤 사무실에서 웃고 있다. 유고운씨 제공

2021년 11월 유씨는 암 수치(종양표지자)가 정상 기준치보다 3배 높다는 건강검진 결과를 받았다. 당시 유씨는 프로그램 2개를 동시에 맡고 있었다.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일은 줄지 않았다. 업무를 조율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책임감을 보여달라”는 식의 말만 돌아왔다. 건강검진 때 127이었던 암 수치는 5개월이 지난 2022년 4월 1171로 폭증했다. 유씨는 팀장의 허락을 받고서야 방송 녹화를 취소하고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난소암 3기를 진단했다.

지난해 회사는 구조조정을 하며 유씨에게 사직을 권고했다. 그즈음 암이 재발했다. 그해 7월 회사를 떠나며 유씨는 전 사원에게 메일을 남겼다. “최선을 다해 몸담았던 회사를 애정을 가지고 떠날 수 있도록 제가 얼마나 많은 시간 일했는지만 기억해주십시오.” 회사는 유씨의 마지막 부탁을 듣지 않았다. 유씨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서를 제출하자 회사는 장시간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취지의 의견서를 냈다. 회사에 온몸을 바친 유씨는 회사에 맞서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판례와 논문을 찾기 시작했다.

유고운씨가 지난 23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노트북을 열어 자료를 보고 있다. 우혜림 기자

유고운씨가 지난 23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노트북을 열어 자료를 보고 있다. 우혜림 기자

유씨는 편집 프로그램 이용 기록 등을 추적해 자신의 노동 시간을 직접 계산했다. 건강검진 결과를 받은 뒤부터 암 진단을 받기까지 25주 동안 초과 노동 시간만 600시간이었다. 난소암은 출산 경험이 적고 유전 병력이 있으면 발병률이 높다고 했다. 유씨는 세 번의 출산 경험이 있고 암 관련 가족력도 없으니 수년 간 반복해 온 야간 노동과 일상적 과로가 암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실제 지난해 7월 근로복지공단은 야간교대근무를 하다 유방암을 진단받은 간호사의 사례를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공단은 지난 4월 “장시간 노동이 난소암에 영향을 미쳤다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유씨의 산재를 불승인했다.

유씨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 행정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유씨는 재판이 시작되기까지 1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최후 진술 영상을 미리 찍어뒀다. 남편에게는 육아를 위한 지침서를, 세 아들에겐 “행복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남겨뒀다. 늘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 “어린이에게 유익한 방송”을 남기려 했던 유씨는 마지막으로 다른 것을 남기려 한다. 유씨가 말했다. “전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어요. 좋아하는 일을 했고 이렇게 싸워볼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이건 너무 큰 꿈이지만··· 저로 인해 PD들의 환경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바라요.” 사랑했던 일터에 유익한 선례로 남기 위해 유씨는 이번에도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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