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보다 개혁이 어렵다고들 한다. 우리는 항구적인 불안정을 초래할 혁명을 억제하고 합의한 규칙 내 경쟁을 택했다. 그것은 인치 대신 법의 지배, 대표의 민주적 경쟁과 선출(수직적 통제), 국가권력 간 수평적 분할과 견제(삼권분립) 같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일방의 의지로만 바꾸는 건 어렵다. 우리 공동체는 전무 아니면 전부와도 같은 정치 대신 일시적인 후퇴를 감안하더라도 전체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의 안정적인 진보에 합의한 것이다.
윤석열도 개혁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그는 설득을 포기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의지대로 실현하고자 했다. 혁명과도 같았던 ‘결단’은 우리의 취약한 정치 구조가 내란을 막아낼 수도 있지만 내란을 획책할 수도 있는 ‘내란 사태의 구조적 준비 상태’(홍성태)라는 것을 드러냈다. 내란이 남긴 교훈은 우리 정치 구조의 한계를 배경으로 언제든 규칙을 허무는 혁명과도 같은 항구적 불안정이 법의 이름으로 가능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불붙는 사법부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도 유사한 불안을 품게 한다. 민주당이 사법부를 향해 윽박지르는 장면을 보면서 이들이 하고자 하는 것이 내란의 극복과 개혁인지, 원한에 의한 복수인지, 정치적 노림수에 따른 정치공학인지 분간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부수고자 하는 것인지 세우고자 하는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9월25일자 ‘경향의 눈’ 칼럼이 정확히 지적했듯 “헌정적 수단에 의한 내란 극복, 이것이 내란을 막아낸 다수 국민의 합의”다. 전방위적인 압박에 굴복한 사법부가 또다시 누군가에게 ‘충성’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렇게 달성될 사법개혁이나 내란 종식이 우리 공동체 이익과 더 나은 사회에 복무할지 알기 어렵다.
사법부가 민주주의 가치에 적대적이거나, 사법부가 통치 세력이나 통치자와 결탁 또는 종속했을 때, 법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는 훼손된다. 그 때문에 우리 민주화는 대표를 인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 외에 사법부의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을 뜻하기도 했다.
하지만 독립적 사법부가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건 아니었다. 나아가 정치의 사법화가 심화되면서 법치는 민주주의와 극심한 긴장 관계에 놓인다. 정치를 대상으로 한 사법부의 판결은 늘 당파성 시비에 놓인다. 내란을 두고 이러한 갈등은 더 극렬해지고 있다. 우리의 취약한 정치 구조의 한 단면이다.
내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내란은 끝났고 단죄가 진행 중이다. 내란 재판을 두고 벌어지는 사법개혁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정치의 공세 대 사법부의 저항 구도여선 안 된다. 내란 종식 대 내란 옹호의 구도도 곤란하다. 사법개혁은 가장 탈정치화된 논쟁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치화된 사법부라는 문제는 정치 실패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