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1일 대구 가창 골짜기에서는 10월항쟁을 기념하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슬픈 행사가 열린다. 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이 모임을 이끄는 채영희 회장이 유족들과 함께 앞으로 나와 ‘골로 가버린’ 이들을 그리며 “아버지~”를 외치는 것이다. 국가폭력에 대한 원망, 억울한 희생에 대한 서러움, 진상규명이 지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야속함으로 행사는 늘 절규와 눈물범벅으로 끝이 난다. 이 행사는 우리 사회의 냉전적 역사 인식에 맞서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10월항쟁은,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해 그해 가을 전국으로 불길이 번진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저항운동을 말한다. 해방이 되었으나 달라진 것 없는 권력의 권위주의적 억압, 식량 부족과 강제 공출, 친일 관료 경찰의 부활에 절망한 노동자·농민·학생·시민이 함께 들고일어난 일이었다. 그것은 불의에 맞선 민중의 자발적 분노가 집약된 저항으로 해방 이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민중항쟁이었다.
미군정은 이를 좌익 세력의 선동,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몰아붙이며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폭력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체포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분단 체제와 반공 이데올로기의 지배하에서 국가권력은 이 항쟁의 본질을 왜곡해 남로당, 전평과 같은 전위조직의 선동으로 일어난 폭동이라 따돌렸다.
민주화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 일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연구자들과 민주 시민들은, 10월항쟁은 ‘전위조직의 동원’ 테제가 아니라 굶주림과 불평등, 억압적 권력에 맞서 분출한 ‘민중의 도덕적 분노’ 테제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적실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의의를 이렇게 인정했다.
첫째, 10월항쟁은 해방 이후 우리 민중이 처음으로 보여준 가장 큰 저항이었다. 그것은 해방 공간에서 정의의 기준을 벗어나는 미군정에 분노해 민중이 자발적으로 나섰던 것이며 친일 관료와 지주가 계속 권력을 잡고 민중을 배제하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운동이었다. 둘째, 10월항쟁은 대구에서 불이 붙었으나 경북·부산·경남·전라·강원·충청 등으로 번져나갔다. 어느 학자가 ‘추수 봉기’라고 불렀던 것처럼 이 항쟁은 1946년 가을 들불처럼 전국에서 타올랐다. 셋째, 10월항쟁은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적 뿌리 가운데 하나가 분명했다. 민중이 스스로 권리를 지키기 위해 부당한 권력과 싸웠던 경험은 그 후 이어진 많은 민주화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혁명, 빛의 혁명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흐름 속에서 10월항쟁은 역사의 맨 앞자리에 놓여 있다. 10월항쟁은 민중 직접 행동의 전통을 여는 출발점이라 하겠다.
10월항쟁은 이제 ‘조직 동원설’이 아니라 ‘민중 주체설’로 분명히 이해되고 있다. 미군정과 분단 기득권 세력이 10월항쟁을 전위조직의 선동으로 이루어진 폭동이라고 하면서 항쟁의 정당성을 폄훼한 역사 왜곡은 바로잡히고 있다. 10월항쟁은 ‘좌절한’ 혁명이었으나 민중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자로 직접 행동한 것이었다. 경찰의 발포 직후 즉각 봉기가 일어났고, 순식간에 전국 각 지역으로 확산했으며, 식량 확보와 토지개혁 같은 생활상의 요구가 주를 이루었고, 일부 지역에서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려는 자치 행동이 있었던 것 등은 민중이 역사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주체적 행위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10월항쟁은 해방 이후 사회대개혁의 요구를 내건 ‘민주주의 운동의 시작’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 같다. 촛불혁명, 빛의 혁명이라 부르는 광장 민주주의의 원형을 10월항쟁에서 발견할 수 있다. 10월항쟁은 해방 이후 민중이 역사 무대에 처음으로 집단적, 주체적으로 등장한 사건이다.
이러한 10월항쟁의 정신을 기리는 움직임이 최근 활발해지고 있다. 대구에서는 수년 전 ‘10월항쟁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졌고, 올해는 ‘10월항쟁 발상지 표지판’이 설치됐다. 가을에는 문화 행사와 학술 심포지엄도 열린다. 대구·경북 지역사회가 오랫동안 가꾸어온 노력이 조금씩 빛을 보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10월항쟁은 특정 지역의 일이 아니라 전국적 민중항쟁이며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이기 때문에 이제는 국가적 차원의 기억을 통해 그 뜻이 이어지면 좋겠다.
1946년 10월항쟁에 나섰던 민중의 용기와 분노는 지금도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으로 살아 있다. 국가가 나서서 올바르게 기억하고 우리 역사에서 민중 주체성을 복원하며 민주주의 역사의 계보 속에 10월항쟁을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