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레놀.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타이레놀이 자폐스펙트럼장애(이하 자폐)와 연관돼 있다고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죠. 타이레놀은 미국 제약사 맥닐이 1955년에 출시한 아세트아미노펜 성분 약의 제품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해열·진통제입니다. ‘임신 기간에도 써도 안전한 진통제’로 잘 알려진 타이레놀이 자폐 유병률을 높인다는 뉴스는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는데요. 오늘 점선면은 트럼프 발 ‘타이레놀 자폐 논란’이 무엇이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 이슈를 왜 꺼내 든 것인지 분석해볼게요.
점(사실들): 트럼프 “임신 중 타이레놀 복용, 아기 자폐증 위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경향신문 자료사진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이 임신 중 타이레놀을 복용한 뒤 출산하면 아기의 자폐 위험이 커진다고 발표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타이레놀로 널리 알려진 아세트아미노펜은 임신 중 복용하면 (태어날 자녀의) 자폐위험을 매우 높일 수 있다”며 “따라서 타이레놀 복용은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식품의약국(FDA)은 임신 중 타이레놀 복용 제한을 강력히 권고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00년 대비 자폐 유병률이 약 400% 늘었다는 미 보건당국의 통계를 근거로 들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쿠바에서는 타이레놀을 복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폐 환자가 적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그는 “쿠바에는 그것(타이레놀)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매우 비싸고, 그들은 그것을 살 돈이 없기 때문”이라며 “듣기로는 그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자폐가 없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맥락들): 과학계 “타이레놀과 자폐증 연관관계 없다”
타이레놀. 연합뉴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타이레놀과 자폐 연관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와요.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증거 없이 아세트아미노펜이 자폐 원인이라고 주장했다며, 과학자들이 수년간 아세트아미노펜과 자폐의 잠재적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지만 뚜렷한 연관 관계를 찾지 못했다고 지적했는데요. 실제로 의학계에선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복용과 자폐 진단이 무관함을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계속 나왔습니다. 미국의사협회저널(JAMA)에 지난해 게재된 논문을 보면 아세트아미노펜과 자폐 발생 간에 유의미한 관계가 발견되지 않았어요.
트럼프 대통령이 근거로 들었던 ‘2000년 대비 자폐 유병률이 약 400% 늘었다’는 미 보건당국 통계는 사실이긴 합니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2023년 11개 주 데이터를 바탕으로 아동 36명 중 1명이 자폐 진단을 받아 2000년(150명 중 1명)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고 밝혔는데요. 자폐 증상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자폐에 대한 의학적 진단 기준도 완화되면서 진단 건수가 급증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럽의약청(EMA)도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근거가 없다”고 밝혔어요. 타릭 야사레비치 WHO 대변인은 지난 23일(현지시간) “타이레놀이나 백신이 자폐를 유발한다는 보고는 없다”며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EMA도 “현재까지의 근거에 따르면 임신 중 파라세타몰 복용과 자폐 사이에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현행 권고안을 변경해야 할 새로운 근거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산부인과학회(ACOG)도 성명을 내고 “아세트아미노펜은 임신 중 통증 완화에 여전히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선택지”라고 밝혔어요.
한국의 식품의약품안전처도 지난 25일 타이레놀 자폐 논란과 관련해 입장을 밝혔는데요. 식약처는 의사와 상의 후 일정 용량 내에서 복용하면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식약처는 임산부가 고열을 참고 견디는 것이 태아에게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밝혔어요. 식약처는 “임신 초기에 38도 이상 고열이 지속되면 태아 신경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임신부가 고열에 시달리는데도 해열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태아의 자폐 발생 위험이 급증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면(관점들): 타이레놀 공격 속셈은 ‘마하’ 기반 보수 지지층 결집
미국의 대표적인 ‘백신 음모론자’로 꼽히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 연합뉴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근거가 없음에도 왜 이러한 ‘비과학적’ 주장을 하는 걸까요? 트럼프 대통령의 타이레놀 공격 이면에는 ‘마하(MAHA·미국을 다시 건강하게)’ 운동이 있습니다. 점선면 독자님들도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들어보셨어도 마하는 생소하실 수 있는데요. 마하는 ‘국민을 건강하게 만들어 미국을 강하게 만들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구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행정부 산하에 마하위원회를 설립해 이 어젠다를 추진하고 있어요.
마하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동 비만율은 6세 이상 기준 20%를 넘어섰습니다. 1970년대에 비하면 270% 뛴 수치입니다. 청소년 당뇨 전 단계 유병률도 25% 이상을 기록했고, 아동 암 발병률은 1975년 이후 40% 증가했습니다. 자폐 같은 정신적 질병도 8세 기준 31명 가운데 1명 수준으로 늘었고요. 트럼프 정부는 이 같은 어린이 만성 질환의 원인으로 냉동피자, 탄산음료, 과자 등 식품첨가물이 많이 들어간 초가공식품을 꼽고, 이에 대한 대대적인 식품 개혁에 돌입한 상태예요. 트럼프 정부는 석유기반 식용색소 8종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의 대대적인 식품 개혁안을 추진하고 있어요.
이런 방향의 식품 개혁안, 물론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마하 운동이 ‘백신 불신’이라는 비과학적인 음모론도 같이 퍼뜨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마하 운동을 이끄는 이는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입니다. 그는 미국 내에서 대표적인 ‘백신 음모론자’로 꼽혀요. 2007년부터 백신 반대 단체에서 활동해온 그는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백신 때문에 자폐에 걸린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해왔습니다. 또한 홍역이 유행할 때는 백신 대신 생선 간유와 비타민A를 먹으라고 권유하기도 했었죠. 그는 백신 음모론을 정치적 발판으로 삼아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자 CDC 산하 예방접종자문위원회(ACIP) 위원 17명 전원을 한꺼번에 해임하기도 했어요.
트럼프의 이번 타이레놀 공격도 결국 백신 음모론의 연장선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케네디 주니어 장관은 자폐의 원인을 밝히는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는데요. 백신과 자폐의 연관 관계가 밝혀지지 않자, 타이레놀로 책임을 돌렸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백신 음모론은 보수 지지층 결집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는 초·중·고·대학교에 연방 자금 지원을 금지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는데요.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층 결집을 위해 백신 문제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문제는 이 백신 음모론이 미국인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는 지난 2월 아동이 홍역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본격적인 홍역 확산세가 시작됐어요. 미국에서 홍역 사망자가 나온 건 10년 만에 처음인데요. 특히 텍사스주에서 확산 속도가 가장 빨랐습니다. 전문가들은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텍사스 지역에서 케네디 주니어 장관의 백신 음모론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지적했어요. 텍사스에서 확인된 홍역 확진 762건 가운데 718건은 백신을 접종하지 않았거나 접종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사례였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백신 반대 정책 기조가 계속된다면 홍역뿐 아니라 백일해, 소아마비 등 백신으로 예방 가능한 질환이 유행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어요.
과학이 아닌 음모론에 빠진 사람에게 계속 나라를 맡겨도 되는 건지 아찔하기만 한데요. ‘부정선거’라는 음모론에 빠진 사람에게 나라를 맡겼었고, 그 음모론의 힘이 줄어들지 않는 한국 입장에서 미국의 일이 남 일 같지만은 않아 씁쓸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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