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주유엔 대한민국대표부에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과 악수하며 기념 촬영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한·미 환율 합의는 대규모 대미 투자는 원하면서도 그로 인한 달러 강세는 원치 않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모순된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은 3500억달러 대미투자를 하더라도 이후 환율 정책에 제약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관세 전쟁’이 ‘환율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기획재정부와 미국 재무부가 1일 발표한 합의안은 ‘한국이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원화 약세(강달러)를 유도한다면 환율 조작으로 간주하겠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합의 자체는 주요 20개국(G20)이 오랫동안 견지해온 ‘환율은 시장에 맡긴다’는 기존 원칙을 재확인한 수준이다.
그러나 국민연금 등 정부 투자기관을 환율 조작에 동원하면 안 된다는 내용은 한국에 부담이 된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 6월 발표한 환율 보고서에서 한국을 ‘환율 관찰대상국’으로 지정하면서 국민연금의 외환스와프를 원화 가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으로 꼽았다. 외환당국은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국민연금과 650억달러 규모의 외환스와프 계약을 맺고 있는데 이를 인위적 개입으로 본 것이다.
합의문은 “정부 투자기관의 해외투자는 위험 조정이나 투자 다변화 목적에 따라 이뤄져야 하고, 경쟁적 목적의 환율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이는 미·일 환율 합의와 같은 내용이지만, 한국의 요청으로 미국의 작성한 초안에 담겼던 ‘연기금’이라는 표현은 최종안에서 빠졌다.
합의문은 “환율의 과도한 변동성이나 무질서한 움직임에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외환시장 개입을 허용했다. 다만 ‘과도한 변동성’의 기준이 모호해 미국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입장에서 이번 합의는 관세 효과를 무력화할 수 있는 인위적인 원화 약세를 차단하기 위한 장치다. 예컨대 미국이 15%의 관세를 매기더라도 원화 가치가 지금보다 10% 떨어지면 미국 소비자가 느끼는 한국산 수입품의 가격 상승 폭은 5%에 그친다. 한국의 3500억달러 대미 투자 이후 달러 강세에 대비한 포석일 수도 있다. 한국이 대미 투자를 늘리면 달러화가 국내에서 빠져나가 원화 약세 가능성이 커지는데, 이는 미국이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다. 한국은 이번 합의로 미국에 3500억달러 직접 투자 부담을 지면서 그로 인한 환율 방어(약달러 유도) 압박까지 받게 되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번 합의에서 미·일 합의문에 담겼던 “환율은 시장에서 결정돼야 한다”는 문구가 빠진 것이다. 약달러를 선호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부는 이번 합의로 환율조작국 지정 리스크는 낮췄다고 평가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합의문 기준에 따르면 한국이 환율조작국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특정 환율 목표치를 요구받지 않은 것도 한국 정부의 외환 정책 자율성을 높일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환율 조작’ 판단을 내리면 환율조작국 지정이나 추가 관세 부과 압박을 받을 여지는 여전히 남는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 6월 “불공정한 환율 관행이 포착된 국가에는 대통령에게 관세 부과를 권고할 수 있다”면서 한국에 대한 감시 강화를 예고했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에 대한 관찰대상국 지정이 해제되기를 바랐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며 “한국이 원화 약세 상황을 의도적으로 조장하거나 유지해서도 안 된다는 메시지가 깔려 있다”고 평가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국민연금 등 공적 기관의 해외투자 과정에서 투자 목적과 절차를 더 명확히 하고, 한국은행과의 외화스와프 등 협력 구조를 더 투명하고 제도적인 틀 속에서 재정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