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협상에서 3500억달러(약 490조원)에 달하는 현금 출자를 강요하는 미국 대통령을 보는 느낌은 매우 당혹스럽다. 한국 정부가 국가재정과 외환시장의 충격 없이 3500억달러를 조달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국가들은 무역을 통해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트럼프에게 무역은 일방적인 압박의 수단일 뿐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로 국제 무역질서가 무너지면서 이제 합리적 대화와 협상을 통해 미국과 어떤 일을 도모하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무역질서의 ‘룰 메이커’(규칙 제정자)였다. 각국의 관세 인하를 적극 유도했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거쳐 세계무역기구(WTO)가 1995년 출범했고, 중국은 2001년 11월 WTO에 가입하며 세계 경제에 본격 편입됐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중국의 WTO 가입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했다. 미국은 중국 시장에 자국의 첨단 제품을 팔고, 값싼 중국 제품을 들여와 물가를 안정시켰다. 미국 시민들은 월마트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을 사며 자유무역의 이익을 체감했을 것이다.
그랬던 미국이 과거의 행적을 지우고 있다. 트럼프는 166개 회원국으로 이뤄진 WTO 체제의 종말을 선언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미국은 WTO 체제로 제조업 일자리와 경제적 안정을 잃었고 가장 큰 수혜자는 중국이었다”고 했다. 미국은 이제 WTO의 근본 원칙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국가별로 관세에 차등을 두는 상호주의 관세 모델은 기본적으로 WTO 다자주의의 핵심인 최혜국대우(특정 국가에 어떤 혜택을 주려면 모든 회원국에 동일한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WTO가 공정무역과 정부보조금을 둘러싼 논란에서 한계를 보이긴 했지만 국가 간 분쟁에서는 안전판 역할을 해왔다. 특정 국가가 불공정한 무역 여건을 만들고 있다면 제도 안에서 방법을 찾는 게 상식에 부합하나 트럼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WTO를 걷어차고 무역질서를 과거 중상주의 시대로 몰고 가고 있다. 자유무역이 선이고 보호무역이 악인 것은 아니다. 개도국이 자국 산업의 국제적 경쟁력 확보를 위해 관세 장벽을 세우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미국이 한때 보호무역의 철옹성이었다는 사실도 맞다. 그러나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미국이 이제 와서 피해자라며 일방적 관세 장벽을 치는 건 스스로 신뢰를 허무는 처사다.
트럼프 통상정책이 지속 불가능할 것이란 전망도 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트럼프 임기가 3년 이상 남았고 그의 추종자들이 공화당을 장악하고 있어 트럼피즘이 단기간에 끝날 가능성은 낮다. 민주당이 2028년 대선에서 이기더라도 무너진 미국의 시스템을 복원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일단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관세협상 타결에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한국은 지난해 미국 수출액으로 전체 수출의 18.7%인 1278억달러를 기록했고 대미 무역흑자는 557억달러였다. 현실적으로 미국 시장을 등질 수는 없다. 차라리 높은 관세를 부담하겠다며 3500억달러 투자 요구를 거부할 수도 있지만 시장에 미칠 후폭풍은 상당할 것이다. 무제한 통화스와프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투자 금액과 조건을 국익에 맞게 조정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부의 짐이 무겁지만 중장기적으로 미국 비중 낮추기 전략은 필수적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상당 기간 글로벌 무역질서는 양자 및 복수국 간 협정 중심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이에 따라 유럽연합(EU)이나 일본 등과 새로운 통상질서를 위한 논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미국에 트럼프 무역정책이 고립을 자초할 것이라 설득해도 먹힐 리 없고 미국의 압박을 받을 때마다 “WTO 규칙 위반”을 들고나오는 중국도 글로벌 무역질서의 리더가 되기는 쉽지 않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한국인 기술인력 300여명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던 장면은 충격이었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면서 한편으로는 미국이 동맹국 한국에 도움을 줬다면 그 역시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란 평범한 사실도 일깨워줬다. 트럼프가 보여주는 모습이 미국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질서를 주장하면서 과거로 돌아간 트럼프를 보노라면 민주주의와 인권, 포용으로 상징돼온 미국의 소프트파워도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관철 사회경제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