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고 기자는 사건을 기록한다.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고 빵집에서는 빵을 굽는다. 가자지구에서는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은 사람을 죽였고 사람을 죽였다. 병원을 폭격하고 언론인을 살해했다. 기근을 만들었고 식량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았다. 길고 좁은 모양의, 면적으로는 세종시 정도 되는 가자지구는 오래전부터 ‘하늘만 뚫린 감옥’이라 불렸다. 지금 그 하늘에는 드론이 날아다닌다. 사람들은 2년째 감옥 안에서 피란 중이다.
우리가 깨끗한 물과 안전한 음식을 바라는 것이 사치가 아니라면 팔레스타인 민중에게도 그래야 한다. 떠나지 않아도 되는 집, 친구들과 놀고 배울 수 있는 학교, 아프면 찾아갈 병원 같은 것들이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능해야 한다면 가자지구에서도 그래야 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유가 영토와 주권을 보장받지 못한 때문이라면 독립된 국가를 이루는 꿈은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민중이 국가를 가지는 것은 점점 더 비현실적인 희망으로 취급되었다.
2023년 10월7일 시작된 일을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1948년 이후 제2차 독립전쟁”이라고 했다. 팔레스타인 민중이 나크바(대재앙)의 해로 기억하는 1948년을 이스라엘은 국가를 창설한 해로 기념한다. 그들의 땅이 아니었을 뿐이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천명한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이,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민중을 무시한 채 강요한 1947년 유엔의 영토 분할안이, 그 땅을 이스라엘의 것처럼 보이게 했을 뿐이다. 그러자 분할된 땅보다 더 많이 점령하는 것이 점점 더 이스라엘의 정당한 권리처럼,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것이 점점 더 평화의 방법처럼 보이게 됐다.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확실하지 않음. 지금은 행동할 때임.” 2023년 10월 이스라엘 국가안보 및 시온주의 전략 연구소는 발 빠르게 가자지구의 인종청소 계획을 내놓을 수 있었다.
지난주 제80차 유엔총회가 개회했다. 총회를 앞두고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선언이 잇따랐다. 영국·캐나다·호주·프랑스 등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것이 역사적 책임이라 말하던 국가들이 입장을 선회했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네타냐후 총리가 연설을 시작하자 77개국 100여명의 외교관이 집단 퇴장했다. 분명 이례적인 흐름이었다. 역사가 변곡점을 지나는 것일까.
지난달 29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평화 구상’을 내놓았다. “마침내 팔레스타인인의 자결권과 국가 건설을 위한 신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평화 구상’에 정의는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군의 단계적 철수도, 가자지구의 치안과 통치도, 가자 주민을 위해서라는 개발도, 팔레스타인 민중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옥은 그대로고 달라지는 것은 트럼프가 의장이 되어 이끄는 ‘평화위원회’가 가자지구의 통치를 담당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하마스에 이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전면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스라엘은 물론 이 계획을 지지했고 프랑스·독일·이탈리아도 하마스가 이 계획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배당할 것인가 절멸당할 것인가. 팔레스타인 민중에 허락된 선택지는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비통한 마음으로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허락된 선택지를 질문하게 된다.
유엔총회 연설에서 팔레스타인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이재명 대통령의 침묵도 선택지일 수 있겠다. 우리가 겪은 식민지배와 전쟁의 폐허가 저력의 증거로 과시되는 데 멈춰도 괜찮다면, 어떤 침묵은 가해자와 연대하는 선택지가 된다는 점을 모를 수 있다면. 가자지구를 향해 항해를 떠난 활동가 해초의 선택지도 있다. 강정의 생명평화대행진과 새만금 신공항을 반대하는 ‘새, 사람 행진’을 이어, 땅으로 갈 수 없어 배로 갈 뿐이라는 그의 말을 선택으로 읽는다면. 그러나 해초의 말은 피지배도 절멸도 선택지가 될 수 없듯 우리에게도 선택지가 없음을 일깨운다. 우리는 진실을 보아야 하고 말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1948년 이미 사라졌어야 할 존재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사라질 수 없고 사라지지 않는 것은 어떤 존재에 선택지가 아니다. 존재함 자체가 정의다. 정의 없이 평화 없다. 10월18일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2년을 규탄하는 전국집중행동이 열린다.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는 대가가 죽임이 아닌 세계는 가능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민중과 함께하는 일은 선택지가 아니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