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미국 유력 언론 기사에 따르면, 미국 민주당 내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약진하고 있다. 어린 시절 2008년 금융위기로 가정이 무너지는 걸 목격하며 자본주의 시스템에 깊은 불신을 갖게 된 세대가 이제 정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뉴욕의 젊은 사회주의자 조란 맘다니 같은 새로운 정치 스타들을 필두로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DSA)’ 같은 조직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18~29세 미국인의 62%가 사회주의에 호의적이라고 답할 만큼 이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소수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맘다니를 향해 “100% 공산주의 미치광이”라며 원색적 비난을 쏟아냈다. 이는 맘다니의 반이스라엘 성향과 급진적 경제정책을 한데 묶어 ‘위험한 극좌파’라는 상징을 만든 뒤,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극우와 맘다니의 사회주의는 ‘기성 정치에 대한 깊은 불신’이라는 동일한 토양에서 자라났다.
수십년간의 세계화와 2008년 금융위기는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시스템이 우리를 배신했다’는 깊은 실망을 안겼고, 워싱턴 엘리트에 대한 불신은 임계점에 달했다. 이 상실감을 자양분 삼아, 트럼프는 이민자와 중국 등 ‘외부의 적’을 지목하며 지지층을 규합했다. 반대로 맘다니는 월스트리트와 자본주의라는 ‘내부의 시스템’을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하며 젊은 세대를 사로잡았다. 결국 중도적 해법이 설 자리를 잃은 정치 지형에서, 양극단의 주자들은 ‘판 자체를 뒤엎자’는 급진적 메시지로 불신에 빠진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트럼프와 맘다니, 둘 중 누가 더 나을까? 대중적 흡인력만 본다면 트럼프가 우세할 것이다. 그의 핵심 구호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빼앗긴 과거’에 대한 유권자들의 향수와 분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위대한 과거를 훔쳐간 범인으로 이민자, 중국 같은 명확한 ‘적’을 지목해준다. ‘국뽕’은 이처럼 단순 명쾌하다. 반면 자본주의의 구조적 개혁을 논하는 맘다니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당장 눈앞의 적을 지목하기보다 우리 모두에게 불편한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과 어려운 과제를 제시한다. 분노의 시대에 이는 화풀이보다 시원하지 않다.
그러나 분노에만 호소하는 정치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트럼프가 그리는 ‘위대한 미국’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되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대체 어느 시대인가? 강력한 보호무역으로 미국 제조업 초기의 기틀을 닦았던 1890년대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시대인가? 아니면 세계 제조업 최강국으로 우뚝 섰던 1950년대의 ‘황금기’인가? 그것도 아니면 대규모 감세와 규제 완화로 신자유주의를 열었던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시대인가? 문제는 이 세 시대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완전히 모순된 비전이라는 점이다. 매킨리의 보호무역주의는 레이건의 자유시장 이념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1950년대의 ‘큰 정부’ 모델은 레이건 시대가 타파하려 했던 바로 그 대상이다. 트럼프는 이처럼 서로를 부정하는 시대들을 아무렇지 않게 한 바구니에 담아 ‘위대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반면 맘다니의 지향점은 실현 가능성, 호불호를 떠나 일관적이고 명확하다. 그의 비전은 미국 역사상 가장 평등했던 과거의 성공 모델과 현재 가장 안정적인 복지국가로 꼽히는 북유럽 모델을 결합하는 것이다. 그가 복원하려는 과거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신을 계승한 1940~1960년대의 미국이다. 당시 높은 한계세율로 부의 편중을 막고, 강력한 노조가 성장의 과실을 공유하며, 대규모 공공투자로 역사상 가장 두꺼운 중산층을 탄생시켰다. 동시에 그가 지향하는 미래는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즉 주거·의료·교육 같은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더 이상 시장에 맡기지 않고 국가가 책임지는 보편적 권리로 보장하는 체제다. 그의 대표 공약인 임대료 동결, 공공주택 확대 등은 바로 이러한 철학을 현실 정치에서 구현하려는 도구에 해당한다.
한국의 극우 정치는 ‘마가’보다 더 조악하고 위험하다. 트럼프의 반중국에는 ‘중국 때문에 미국 제조업의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경제적 논리가 있다. 이에 반해 한국 극우의 반중국 정서는 뚜렷한 경제적 맥락도 없이, 명동 한복판에서 “중국인 나가라”를 외치는 식의 ‘묻지마 혐오’에 가깝다. 구체적인 피해 사실을 따지기보다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증폭시키고 소비하는 데 집중한다. 적에 대한 증오심만 선명하게 남는다. 이런 분노의 정치를 통해 극우는 살아남겠지만,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